언제부턴가 우울증은 한국 사회에서 친숙한(?) 단어가 되었다.
얼마전,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가진 초등학교 교사가 학생을 해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서울 강남에서는 학원 다음으로 정신과 병원이 많다는 보도가 나왔다. 치열한 경쟁과 높은 기대치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사회 전체가 직면한 현실이 되었다.
10여 년 전, 나 역시 그 불청객을 맞이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를 지켜보며 기회를 엿보던 것처럼, 한순간에 일상을 무너뜨렸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던 내게 갑자기 찾아온 이 감정들은 너무 낯설고도 두려웠다.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잠시 머물다 떠날 손님처럼 가만히 둬야 할까, 아니면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까.
우울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생물학적으로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등의 불균형이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요인 또한 크다. 어릴 때부터 성적을 위해 경쟁하고, 성인이 되면 직장과 사회에서 성과와 생존을 요구 받는다.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환경에서 쉽게 지치고,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잃는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한신경과학회에 따르면, 한국의 우울증 치료율은 10% 미만으로, 미국(70%)이나 일본(60%)보다 현저히 낮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낙인은 우울증 환자들을 더욱 고립시킨다.
우울증은 처음에는 감옥 같았다. 좁은 공간 안에서 숨이 막히고, 세상이 나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 불안은 밀어내려 해도 다시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결국 나는 그것들과 싸우는 대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우울증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 감정들이 내 삶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차츰 그들과 거리를 두는 법을 익혔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쫓아낼 수도 없는 존재처럼,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정의해 나갔다.
어느 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늘 널 기다렸다."
우울과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것들을 하숙집 주인처럼 일정기간 머물게 하거나, 펜션 주인처럼 잠시 지내게 하지 않았다. 대신 집주인처럼 맞이하며, 삶의 균형을 지켜나가기로 했다.
이제 우울증은 특별한 질병이 아니다. 누구나 마주할 수 있으며, 함께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부정하거나 숨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치료를 받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결국, 우울증은 나의 일부일지언정, 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그것들과 거리를 조절하며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