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삼 년 후, 경성철도학교를 함께 들어갔다. 사실, 나는 다니고 싶은 학교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다. 철도학교를 나왔다 해서 모두 기차를 운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관리직에서 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철도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기숙사에서 지내게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거다. 아버지는 이때를 대비해서 그를 고등보통학교에 보냈다. 그래야 경성철도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는 아버지의 뜻에 잘 따라왔다. 아버지는 그를 정확히 보았던 거다. 철도학교 입학시험에서는 아버지의 힘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선인 고등보통학교에서는 그가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지만, 경성철도학교의 수준은 그보다 훨씬 위였기 때문이다. 각지에서 모여든 우수한 학생들의 경쟁이 심했다. 조선인 중에서도 이미 일본인 세상이 되어서 거기에 적응하고 사회에 기반을 닦고 싶어 하는, 조선인 지주의 자제들도 들어왔는데 그들은 일본인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다 그들 중에는 조선 독립을 위하여 분골쇄신할 인물들도 있었다. 당연히 입학시험 경쟁은 높았다.
그는 고등보통학교를 월반해서 겨우 몇 년 학교생활을 했지만, 그것도 나를 가방모찌 하느라 수업시간을 빼먹기도 많이 했으니 철도학교에 들어올 수준만큼의 공부는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입학시험에 아버지 힘이 작용했을 거라는 것을, 나도, 아마 그도 알지 않았을까 싶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그런 그가 철도학교에 들어가서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성적이 잘 나올 리 만무했다. 이론 시험은 꼴찌는 맡아놓고 했다. 그래도 그는 그만두겠다는 말 한 번도 안 하고 버텼다. 공부만이 그를 괴롭힌 것은 아니다. 같은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알게 모르게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그가 일본 학생인 나의 가방모찌라는 것과 종놈이면서 자신들과 같은 자리에서 공부한다는 것도 그가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신문물을 공부한다는 조선인 지주의 자제들도 그런 사상에서는 완전히 깨어있지는 못한 듯했다. 그가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 그의 행동과 표정으로 봐서는 짐작하지 못한다. 겉으로 대 놓고 왕따를 시키지는 못했기때문이다. 누구도 보는 데서 그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아버지 때문이며 그의 묵직하고 말 없는 행동과 특별한 손재주 때문이다. 그는 가방 안에 항상 연장을 챙기고 다녔는데, 책상이나 의자가 부러지거나, 급우 가방끈이 떨어진다거나 사소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의 손재주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번씩 공부하는 거 “힘들지 않아?” 라고 물으면 “아니, 기관수가 될 거야.”라고만 말할 뿐이다. 언젠가 우연찮게 그의 작은 메모장을 들춰보게 되었는데, 일기형식의 글이었다.
<<어떻게든 끝까지 해서, 기관수가 되어야겠다. 내가 경성철도학교 학생이라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이것은 분명 하늘이 점지해 준 나의 운명이며 길이다. 꼭 기관수가 되어야겠다.>>
일기를 읽을 때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그가 얼마나 강단 있는 인물인가를 새삼 깨달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분에서 한 단계 도약하고픈 열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의 공부를 성심껏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인 것은 실습을 나가서 기계를 만질 때는 그가 최고였다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다리를 저는 내가 어릴 때부터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은 오직 책을 읽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서점에 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사치였다. 그와 함께 내가 즐겨 가는 서점 으로 갔다. 서점에 가면 가슴 안에 뭉쳐있던 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듯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날 내려놓고 밖에서 기다린다. 같이 들어가서 책도 고르고 함께 읽다가 오자 해도, 그는 인력거를 지켜야 한다며 사양했다. 내가 책방에 있는 동안 인력거에서 주로 교과서 공부를 했다.
이런 그의 태도가 그를 더욱 좋아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그를 친형처럼 따른다 해도, 그는 우리 집 하인이다. 하인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지키는 자세가 마음에 든다. 그가 나와 허물없는 친분을 유지한다 해도 만약 나와 대등하게 행동하려 했다면 조금은 눈에 거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도 있다. 그날도 나는 이책 저책을 골라서 구석진 작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어깨를 툭 친다.
“아나타 겐꼬?”
“소우요(그렇습니다)”
사내는 내 대답을 듣자 바로 내 팔을 잡아 일으키더니 친한 사람인 양 팔짱을 끼고서는 급히 밖으로 끌고 나간다. 순간, 아 사고다! 눈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다행히 입구에 있는 카운터에서 점원이 우리를 봤다. 내 눈과 마주쳤다. 아마 내 눈에서 공포를 봤던 것 같다.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서점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너 명의 일행에 싸여 책 방 옆 골목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 골목은 인력거를 대어놓은 곳이다. 내 인력거가 보였다. 그들은 내 인력거를 비켜 나를 급히 끌고 갔다. 그는 아마 인력거 안에서 교과서를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소리를 냈다. 순간 냄새나는 손이 입과 코를 막았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 서점의 대단한 고객이다. 점원은 나에게 친절했다. 내가 신간 코너를 먼저 보는 것을 알고, 신간 서적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내어놓으며 추천하기도 했다. 그 날도 내 움직임의 동선을 눈으로 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것이다. 점원이 멀찍이서 우리 뒤를 쫓아 오다가 그에게 알려준 것이다.
좁은 미로 같은 골목을 두 번 꺾었던 것 같다. 나는 다리에 힘을 쓸 수가 없어서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끌고 가면서 사내들은 내 머리며 등 짝을 내리쳤다. 쓰러진 나에게 조선말로 욕을 퍼부으며 무수한 발길질을 해 댔다. 정신이 아찔해서 혼절하려는 순간에도 이상하게 그가 나를 구하러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 믿음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치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하는 말이 들렸다.
“왜 죄 없는 사람을 끌고 가 !!”
“더러운 놈, 일본 놈 앞잡이 !!”
평소에는 한없이 유순한 그였지만 화가 나면 불같은 사람이었다. 앞잡이란 말이 그의 성정에 기름을 부은 것 같다. 그는 물불 안 가리고 씩씩거리며 사내들과 싸움질을 했다. 씨름대회에서 황소를 탔다는 그였다. 사내들이 안 될 듯싶었던지 연장을 꺼냈고 이어 그가 내 몸 위로 엎어졌다. 바위가 내 몸 위로 떨어진 듯한 무게였다. 그의 등 뒤로 나이프가 몇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 그때야 호르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병원에 실려 갔다.
나는 구타로 온몸이 멍투성이였지만 다른 상처는 없었다. 그의 상처는 쉽지 않았다. 등을 칼로 찔린 것은 상처도 아니었다. 조선인 한 놈이 망치같은 연장으로 그의 다리를 강타한 것이다. 종아리 쪽이었는데 뼈가 박살이 났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 해 있어야만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나는 철도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철도학교는 애초에 나와 맞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면 조선도 그랬을 것이다. 다행히 그를 만나 그동안의 생활이 견딜 만했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나 하나였다. 하나인 아들이 절름발이다. 아버지의 나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 우리 가족의 중심원은 나였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철도학교도 절름발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쪽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조선은 우리에게 지뢰밭이었다.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결정을 내리셨다.
일본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병원에 갔다. 그를 보자 사내답지 않게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고마웠다는 말도 못 하고 그의 손을 붙잡고 울기만 했다. 그런 나를 위로하고 싶었는지 한다는 말이 그 다웠다. 아니면 나를 구해 낸 무용담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에 나는 웃었다.
“등짝은 나이프로 찔려서는 웬만해서는 안 죽는다. 배에 찔리면 십중팔구 죽는다, 그래서 쓰러지면서도 뒤로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고꾸라진 거다.”
그때 그는 결국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제 겨우 스물이 넘은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