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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장지구(天長地久) -잊히지 않는 사랑의 순간

 시네마- 아화의 누벅 데님 트러커 재킷

by mi mei mi Feb 05.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 이미지 출처 : 영화 캡처 -- 이미지 출처 : 영화 캡처 -




 심야의 어둠을 가르는 굉음, 교통 법규는 가뿐히 무시하는 모터사이클이 질주한다. 폭주족을 단속하러 나온 경찰의 검문을 피해 달아나며 과속탐지기를 때려 부수는 것도 잊지 않는 그는 홍콩 뒷골목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는 홀로 그를 낳아 키우다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불안정한 생활과 그에게 지어준 아화(유덕화)라는 이름만 남긴 채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무일푼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보잘것없다. 오직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달려 나갈 뿐, 미래를 위한 희망이나 꿈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걸 그는 삶으로 체험하며 알았다. 기댈 곳 없는 무학의 청년이 범죄 조직에 가담하며 일을 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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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영화 캡처 -




 뛰어난 실력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즐기는 아화에게 조직에서 보석을 훔치는 일에 차를 운전해 줄 것을 요청한다. 범죄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됐지만 믿고 따르던 형의 부탁으로 승낙하게 되고 보석상을 터는 당일 경찰의 추격에 궁지에 몰린다. 다급한 순간, 길을 가던 죠죠(오천련)를 인질 삼아 도망치고 범죄 일당과 접선 장소에 간 아화는 그녀에게 차 안에서 보이지 않게 숨어 있을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인질로서 도망칠 순간을 살펴야 했던 죠죠는 고개를 들어 밖을 처다 보다 강도들에게 들키게 된다. 얼굴을 보았으니 살려 둘 수 없다고 그녀를 죽이려는 놈들을 아화가 막아서며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다짐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이 틈을 타 도망가는 죠죠를 거칠게 몰아세운 아화는 헝클어진 매무새 보고 자신의 데님 재킷을 벗어 입으라고 던져 준다.


 

 미리 준비해 둔 바이크를 덮은 장막을 걷고 범죄 차량은 휘발유를 붓고 태운다. 폭발하며 전소하는 산속의 차를 뒤로 하고 아화는 죠죠를 집 앞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다. 해당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에게 아화를 포함한 관련 일당들이 잡히고 인질이자 목격자로 범인 색출을 위한 자리에 나타난 죠죠. 이 안에는 범인이 없다고 둘러 된다. 조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그녀를 습격하는 무리에 아화가 나타나 함께 도망친다. 아무런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만난 것을 계기로 사랑의 감정을 싹 틔웠다.






- 천장지구의 포스터 : 이미지 출처-구글 -- 천장지구의 포스터 : 이미지 출처-구글 -




 1990년 영화 <천약유정> (天若有情)을 국내 개봉 시 '<천장지구> (天長地久)'라는 제목으로 바꿨다.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치 않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출생 신분의 차가 커 감히 생각지도 못했을 남녀의 강렬하고 순수한 사랑을 단번에 각인시킨다. 작품의 분위기와 흐름에 더 맞게 변경된  안성맞춤의 타이틀은 할리우드 영화  <고스트> (Ghost)를 <사랑과 영혼>으로 변경해 영화 몰입에 힘을 실어 준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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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영화 캡처 -




  하루살이 같은 하류 남자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상류의 여자가 첫 만남에 서로를 연결 지을 수 있었던 매개는 옷이었다. 불법 레이싱 도박과 어둡고 거친 세계가 생활인 사내의 일상복이자 전투복인 '데님 트러커 재킷'. 이제 것 인생에서 밝고 좋은 것 만을 알던 여성이 느닷없이 범죄에 휘말려 공황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따뜻하게 감싸 안아 진정 시켜준 것이다.





아화가 죠죠에게  건네준 데님 트러커 재킷아화가 죠죠에게  건네준 데님 트러커 재킷

 



 단정한 차림의 그녀가 입던 옷과는 달랐다. 밝은 탈색으로 도드라진 아이스 워시 (Ice Wash), 부분적으로 *누벅(Nubuck)을 덧대고 스티치로 몸판을 누벼 장식성을 더해 과감하다. 앞판의 포켓은 전통적인 포인티드(Pointed) 모양에 플랩(Flap)이 달려 있는 기본 형태와 개구부에 배색을 넣은 쌍입술 주머니(Jetted)의 비대칭 디자인으로 유니크한 변화를 주었다. 이에 피가 묻고 부분 부분 찢긴 흔적까지 있어 날것의 느낌마저 풍기는 혼란스럽지만 매혹적인 아이템으로 1980년대 후반 유행했던 데님의 형태를 보여준다. 패션을 아는 논다 하는 아이들이 입었을 법한 유행의 첨단을 걷는 아이콘 자체다.



 의상이 극 중에서 따로 놀지 않고 인물과 함께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은 '아화'를 연기한 배우 유덕화의 수려한 외모는 물론, 대체불가의 열연과 옷의 특성을 신체적 장점에 부각해 연출한 핏(fit)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오버 핏의 데님 트러커 재킷의 카라는 높이 치켜세우고 어깨와 상체 볼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앞섶밑단에서 두 개 만을 여몄다. 닫히지 않은 앞부분은 깊은 V(브이) 자 형태를 이루며 전체 실루엣을 잡아주고 터프한 캐릭터의 면모를 나타낸다.




*누벅(Nubuck) :털을 제거한   면을 문질러서 기모를  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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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영화 캡처 -



 상의와 하의를 같은 색상의 데님 셋업으로 통일해서 자주 입는다. 레이서답게 활동성과 맵시를 고려한 하의는 슬림스트레이트. 약간의 구제가 있는 청바지는 밑단을 자연스러운 주름이 가도록 내려 입거나 발목까지 롤업을 하여 하얀색 하이탑 운동화가 다 보이는 코디를 하기도 한다. 또 무릎 밑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져 슬림 스트레이트 보다 타이트한 테이퍼드 핏을 입어 날렵한 이미지도 담는다. 화려한 와펜 장식과 봉제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컷팅해 올이 풀린 데님 베스트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보여주며, 셔츠를 입을 땐 단추를 모두 오픈하고 양팔 소매는 걷어 올려 남성미를 배가 시켰다.



 아화의 극의 흐름에 따른 심리는 입고 있는 데님의 전환으로 나타난다. 이야기의 초반에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눈에 띄는 워싱과 디테일은 죠죠와의 사랑을 인식하고 사귐에 변모한다. 심플하고 깨끗한 화이트 진 (White Jeans) 셋업과 스톤 워시(Stone Wash)를 하지 않고 구제도 없는 단정한 그레이 컬러의 데님 셔츠 착장은 아화의 무질서한 세계가 사랑하는 이를 통해 순화되고 삶에서 안정된 정착을 갖고 싶다는 의욕의 표출이다. 하지만 그녀 집안에 반대로 떠나보내고 조직의 암투에 휘말려 복수의 기로에 섰을 때 다시금 과감한 탈색의 데님을 택한다. 용기를 내어 연인 앞에 다시 선 아화는 안감에 하얀 양털이 들어간 '데님 쉐르파 트러커 재킷'입고 있었다. 그것은 암울했던 그의 삶에 다가온 죠죠의 포근한 사랑이 스민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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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영화 캡처 -




 히로인 죠죠 역시 착장을 통한 감정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저택에 사는 부잣집 외동딸로 부모님께 보호받으며 사랑을 듬뿍 받은 그녀의 옷차림은 단아하다. 단추를 모두 잠가 단정하게 입은 셔츠에 길고 풍성한 롱스커트를 즐겨 입는다. 티셔츠나 셔츠 위에 니트를 등과 어깨에 걸쳐 레이어드 하여 프레피 룩 스타일을, 가녀린 목선이 드러나는 하얀 저지 블라우스는 네크라인에 고급스러운 아플리케 장식이 트리밍 되어 여린 감성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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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영화 캡처 -  




 자카드 소재로 된 스카프를 허리에 두르거나 그 문양이 배색된 베스트는 부스스한 컬리 헤어와 어우러져 순진무구한 캐릭터의 소녀스러움을 돋보이게 한다. 보헤미안풍의 스타일링은 그녀가 얌전하지만 생각은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편견 없이 아화를 대하는 열린 마음의 표현이다. 옷의 소재와 패턴은 클럽에서 추파를 치근덕거리이들이 입은 인위적인 광택의 봄버재킷과 대비되며, 남녀 주인공이 각기 속해 있는 사회가 동떨어져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만남을 가질수록 죠죠의 옷차림이 변해간다. 상의는 얇은 셔츠나 블라우스에서 도톰하고 캐주얼한 옥스퍼드 셔츠로, 소매 커프스는 경쾌하게 접고 다 여몄던 단추는 윗부분을 한 두 개 풀러 스타일에 개방감을 다. 하의는 길고 볼륨 있는 스커트에서 몸의 라인이 드러나는 활동적인 진청의 데님을 입었다. 치마에서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아화가 속한 세상을 받아들이고 융화되는 과정의 지표라 할 수 있다. 청바지에 자카드 패턴 스카프를 꼬아서 벨트로 연출한 모습은 자신이 고수했던 소녀의 성향에서  나아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주체적인 여자로서의 의지를 보인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아화를 위해 헤어짐을 선택하며 집안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된 그녀는 롱 원피스를 입고 순종적인 딸로 돌아가야 했다.



 이렇게 캐릭터에 들어맞는 의상은 청순가련한 죠죠라는 인물에 실제성을 부여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겉 쌍꺼풀이 없고 맑은 눈망울에 고운 얼굴형과 아기자기한 이목구비가 조화되며 그녀를 연기한 배우 오천련의 외모는 시대를 뛰어넘는 청초한 아우라로 감싸인다.







죠죠가 세탁 한 아화의 데님 트러커 재킷 (이미지 출처- 영화 캡처)죠죠가 세탁 한 아화의 데님 트러커 재킷 (이미지 출처- 영화 캡처)




 2008년 <천장지구>를 한국, 중국, 홍콩 합작으로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배우 캐스팅까지 완료되었다는 기사도 났지만 크랭크인하진 못 했다. 만약 영화가 나왔다 하더라도 내게 아화는 유덕화, 죠죠는 오천련뿐이다. 그 시대의 감성과 낭만을 머금은 불멸의 사랑은 두 배우의 합 이외에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는 까닭이다.


 

 애정하는 이와의 첫 만남이 잊히지 않는 순간으로 새겨지게 되는 것은 그 존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연결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데님 트러커 재킷을 주었을 때, 그걸 받아 안은 여자는 가슴에 품고 함께 할 미래를 꿈꿨다. 신분과 처지가 다르다 할지라도 연모하는 마음을 막을 장벽 따윈 없기에. 네온사인 가득한 홍콩 밤거리를 질주하던 애절한 연인은, 그렇게 후회 없이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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