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나 지났을까. 이곳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화이트군단의 회진으로 이른 아침을 시작하고 핑크 군단의 소란스러움을 지나면 점심시간이란 걸 알 수 있다. 금식 중인 나를 배려한 탓에 앞에 있는 젊은 환자는 커튼으로 은폐 엄폐 하고는 점심을 먹는다.
‘나 그렇게 이해심 없는 깐깐한 할머니 아닌데…’
아차, 얼마 전까지도 스물네 살의 구겨진 청춘이었는데, 내 입에서 할머니라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다니… 이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친 게 틀림없다.
그동안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뇌에서 전달하는 지시보다 늘 빠르게 움직이는 줄만 알았던 팔, 다리는 온 의지를 동원해서 동력을 가해야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종종 휘몰아치는 고통에 빠지기도 한다. 어젯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아팠다.
한가롭게 슬픈 감정에 빠진 결과가 눈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감정’이라는 것에 감각을 곤두세우면 정교하게 쌓아 올린 일상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무뎌지기로 했고, 그 방면에서는 성공한 삶이었다.
순도 100%의 통각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어젯밤 나의 몸속에서는 장기 하나하나가 어디 붙어 있는지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격하게 고통스러워할 기력도 없이 끙끙 거리며 앓았던 것 같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엄마’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흘릴 뻔했다. 무릎을 치면 저절로 움직이는 감각처럼, 극도의 아픔은 그 단어와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베갯잇을 흥건하게 적신 땀을 보고 간호사가 진통제를 추가했다. 어서 빨리 진통제가 온몸으로 달려가기를… 초바늘을 따라 모든 순간을 곱씹었다. 통증의 간격에 초바늘 몇 칸을 넣고도 남는 시간이 되자 의식이 흐릿해져 갔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든 것 같다.
쫑알거리는 어린아이의 말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유독 힘든 주말알바를 끝내고 잠이 들면 가위를 눌리곤 했다. 그때 지지직 거리는 소리도,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여든의 할머니도 가위를 눌리는구나... 싶을 때, 손가락을 움켜쥐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할머니 어제 많이 아팠다며, 겨울이가 많이 슬펐어요. 할머니 언제 일어나요, 엄마?”
9살, 유겨울. 손자라는 관계의 낯선 어린이가 내 손을 잡고 쫑알거리고 있었다. ‘휴, 가위는 아니었구나. 병원에서 가위눌리면 더 무서울 것 같았는데… 왠지 영혼도 많을 것 같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겨울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 눈 떴다!”
‘눈 뜨셨다.라고 해야지, 하여간 요즘 애들 버릇없어’ 나는 아이들을 싫어한다. 해맑음을 기본값으로 가진 것 자체가 싫었다. 물론 다 큰 어른이라고 좋아했겠냐마는...
유겨울은 대답도 안 하는 나를 보며 이것저것 떠들어 댔다.
“할머니, 내가 아빠랑 같이 작은 삼촌 산책을 시켜줬는데, 글쎄 똥을 두 번이나 싸는 거야~ 겨울이가 직접 치웠어. 겨울이 다 컸지?”
작은 삼촌을 산책시켜 준다니...? 비몽사몽 했던 잠이 싹 달아나는 듯했다.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로, 나는 두 남매를 낳았던 것 같다. 기억에는 없지만 정황상. 그중 첫째가 이 녀석의 엄마인 ‘강해’다. 내 딸은 나처럼 유겨울, 유여름이라는 남매를 낳아서 키우고 있다. 내가 낳았다던 둘째 ‘강산’이라는 사람은 주말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작은 삼촌이라니… 나한테 둘이 아닌 세명의 자녀가 있었던 것일까?
“우리 겨울이 정말 다 컸네? 진짜 엄마 지켜줄 것 같다. 든든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하는 강해의 말에 겨울이는 으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삼촌 옷도 입혀주고 산책 후에는 발도 씻겨 줬어. 겨울이는 화창초등학교 2학년 1반 반장이니까 못하는 게 없어.”
초딩 손자가 말하는 나의 셋째는 강아지였다. 정말 이름도 ‘강아지’.
강해, 강산, 강아지... 내 작품은 아닌 게 틀림없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 모양으로 주름이 잡힌 남편이라는 할아버지가 범인일 것이다. ‘강’씨 성을 가진 내 남편, 자녀와 반려견 이름으로 인생의 유희를 완성한 그 할아버지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여보, 오늘 자원봉사자분들이 오는 날이라는데, 목욕 좀 할려?”
딱히 대꾸하지 않아도 열심히 말을 걸어대는 말 많은 할아버지다. 이내 병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분홍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을 보니 자원봉사자들인가 보다. 호스피스 병실 이곳저곳을 누비며 환자들을 귀찮게 하는 핑크 군단. 내가 누워 있는 침대를 에워싼 사람들이 하나둘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어머, 오늘은 따님도 오시고 귀여운 손자도 왔네요~ 이서은님 좋으시겠어요.”
“너무 좋아요~, 그렇지 여보?”
나를 대신해 대답하는 할아버지가 온 얼굴의 주름을 다 사용하며 환하게 웃었다. 호스피스라는 이 병동은 참 이상한 것 같다. 나만 빼고 모두 기분이 좋아 보인다. 말기 암 환자들이 가득한 병동을 평온해 보이는 미소와 말투로 채운다.
“오늘은 아내 목욕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동안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통에 열흘을 넘게 못 씻은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기운이 있었다면 날 목욕시켜 달라고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입을 막고 싶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눈을 뜬 이상한 일을 겪은 지도 며칠이 지났고 마침 온몸이 건조한 참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날 목욕시켜 주다니,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싫어요.”
내 목에서 나오는 낯선 노인의 목소리를 피하고 싶어서 그간 말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온 힘을 다해 정확하게 전달했다. 정말 정말 싫다고.
“그럼, 오늘은 샴푸라도 하실래요? 침대에 누워 계시기만 하면 돼요. 샴푸하고 나면 상쾌한 오후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
목욕을 거절한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샴푸를 해주겠다는 말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침대에 누워서 샴푸 해보고 싶다며 떼를 부리는 상황파악 못하는 어린이를 필두로 나의 샴푸 준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