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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얼굴, 그놈 목소리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이야기

by 미묘


과거는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배울 수도 있다.

-라이온 킹-





의식이 희미해 보였다. 안개 자욱한 길을 혼자 걷고 있으리라. 그 환자의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던 아내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옅은 미소로 인사하곤 했다. 늘 부드럽게 거절하던 아내가 오늘만큼은 선뜻 발마사지를 하겠다고 했다. 마음 가득 쌓아둔 회한을 풀고 싶어서였을까. 호스피스 병동에서 그것도 일주일에 딱 하루, 고작 10분 남짓 만나는 나의 존재는 마음속 묵은 돌덩이를 꺼내 보일 수 있는 '적당히 모르는 사람'이다.



남편이 참 고생 많이 했어요.

시장통에서 장사를 오래 했는데, 장사가 잘 되기 시작하니까 문제가 생기더라고.

그땐 어음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어요.

잘 되던 가게에 빚이 어마어마하게 생기고, 그 사기꾼을 찾는다고 제정신이 아니었지 우리 둘이.

그 와중에 아이들은 키워야겠고... 그땐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애들 시집 장가보내고 겨우 숨통이 트인다 싶으니까 남편이 아픈 거예요.

처음엔 모든 게 원망스럽고 그 사기꾼 때문에 인생의 많은 시간이 힘들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각이 안 나...

암만 떠올려 보려 해도 그 사기꾼 얼굴이며 목소리가 하나도 생각이 안 나...

평생 못 잊을 거라 생각했던 그놈 이름 석자가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생각이 안 나요.

그래서 우리가 살았나 봐.




어떤 마음일지 감히 짐작도 못 할 이야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죽을 때까지 절대 못 잊을 것 같던 그놈 얼굴이며 이름, 목소리 어느 것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 어쩐지 고마웠다. 날카롭게 할퀴며 지나가는 이 시간들도 결국엔 흐릿해질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러다 문득 타인의 아픔에 위로받은 내가 싫었다.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나도 모르는 새 뭉근한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게 '살아가는 것'아닐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도움을 받지도 않는다는 생각은 무지에서 나오는 오만함이다. 그러니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혹은 불행이라 여길 신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더라도, 어쨌든 살아가 보자.


죽을 것 같던 순간도 어느새 진짜 죽음 앞에 서면 흐릿한 기억 한 조각일 뿐이다. 나의 죽음 앞에는 웃으며 떠올리는 따뜻한 순간들이 많이 남아 있길 바라본다. 긴 연휴가 끝나고 겨우 버텨낸 오늘도 조금은 살만한 하루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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