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죄지었나요? 바보예요? 왜 이혼 안 해요?
시댁 관련 하소연 글을 보다 보면 이런 댓글들이 자주 눈에 띈다. 동감이다. 말 한마디 못하고 당하고만 사는 답답한 며느리들을 볼 때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었을 땐?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얼마나 현명하고 똑똑하고 당찬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며느리가 된다면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직장 상사의 부당하거나 비합리적인 지시에 반대 의견을 제시해 본 적이 있는가? 아무 잘못 없이 학교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 군대 선임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당한 후임이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길을 걷다 깡패 무리가 이유 없이 시비를 건다면?
이혼은 어떨까? 요즘 세상에 이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일생동안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일 1위는 배우자의 사망, 2위는 배우자와의 이혼이라고 한다. 상실감, 배신감, 죄책감 등의 정서적 스트레스, 부모님, 지인 등 주변 시선과 같은 사회적 스트레스, 자녀 양육 문제, 경제적 문제 등 삶의 모든 부분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다른 사람 일은 쉽다. 제 3자 입장일 때에는 누구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용감하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나에게 현실로 닥쳤을 때, 다른 이들에게 조언했던 내용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절대적인 갑을 관계이다. 게다가 시댁 식구들은 모두 시어머니의 편에 선다. 내 편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남편도, 평생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저버리긴 힘들다.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고, 내 편도 없는 슈퍼 을인 며느리가, 어떻게 감히 시어머니에게 맞설 수 있을까?
그러니 함부로 말하며 2차 가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없는 피해자에게, 왜 그러고 사냐고, 왜 대항하지 않냐고, 이미 수많은 상처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소금까지 뿌려대진 않았으면 좋겠다.
며느리들도 자신의 용기 없던 모습을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부족해서, 나약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시어머니라는 존재자체가 무서웠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혼이 무서웠다. '시어머니도 더 이상 못 참아주겠고, 날 지켜주지 않는 남편도 필요 없어. 더러워서 이혼해야지. ' 하는 생각과 함께 '이러다 진짜로 이혼하게 되면 어떡하지? 내가 혼자서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아이는 어떡하지? 친정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친구들한테는? 이렇게 내 인생은 실패하는 건가? ' 하는 걱정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혼하는 것이 무섭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이혼을 하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계획을 세워본다. 저 멀리 지방에 살 작은 집 정도는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왕 멀리 간 김에 내가 좋아하는 산과 바다를 원 없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 수도 있겠지. 지금 당장 수입은 없지만,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 굶어 죽기야 하겠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라도 비빌 언덕을 만들어 본다. 나를 지켜야 할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두려움 없이, 나를 지킬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 위해.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다 보니 실제로 이혼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남편과 시댁을 대하는 태도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자 남편과 시댁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그래서 이제는 이혼 생각이 없어졌다.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혹시 지금도 상처받으며 힘들어하는 며느리들이 있다면 내 글을 읽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며느리들만 이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도, 시댁도, 어쩌면 며느리 이상으로 이혼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너무 기죽을 필요도,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다.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얕보지 못한다. 이제, 어깨를 펴고 당당해 지자.
대한민국 며느리, 파이팅!
왜 며느리만 되면 할 말도 못 하는 바보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