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빛결, 숲의 숨》
서울 강서구의 조용한 골목, 비커밍 갤러리의 유리문을 지나자마자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커다란 소녀의 눈동자였다. 그녀는 빛의 숲 속에서 유니콘과 함께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결에 일렁이며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그 모습은 마치 나 자신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는, 상상이라는 숲을 지나야 비로소 온다.”
그 문장처럼, 전시 제목이 품고 있는 깊은 울림이 비커밍 갤러리 입구부터 서서히 퍼져 나온다. 《어느 빛결, 숲의 숨》(2025.6.4–6.23, 서울 강서구 비커밍 갤러리) 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경유한 감각의 여정을 선사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첫인상은 “숲”이지만 동시에 “물 위”다. 작가가 그린 나무와 풀잎이 물결 위로 그 모습이 전이되는 순간, 관객인 저는 얼마간 멈춰 서서 그 잔상에 숨을 고른다. 이 ‘반영된 자아(reflected self)’라는 주제는 작품 곳곳에서 물빛처럼 띠지를 두르고 있다. 물 위 회전목마, 유니콘, 별빛들—어린 시절의 환상을 부드럽게 불러내는 상징들이 현실의 시간에 다시 깃든다.
갤러리 앞에는 작은 칠판이 있었다. “편하게 들어오세요. 무료!”라는 문구와 함께, 방문록을 쓰면 작은 선물을 준다는 안내가 있었다.
예술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소소하고 친절한 문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포스터 이미지)
이 첫 그림은 전시의 전체 감정선을 대표하고 있었다.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소녀는 울지 않지만 눈물 문양을 얼굴에 새기고 있다. 그녀가 바라보는 물 위에는 유니콘이 일그러진 채 반사되어 있다. 이것은 작가가 말한 ‘반영된 자아’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반짝이는 꽃잎, 바람결, 금빛 회전목마의 왕관.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깊은 초록과 보랏빛 숲 사이로 파란 물길이 흐른다. 그 위에 멈춰선 회전목마. 소리 없는 세계였다. 작가노트에는 “환상은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었다.
나 역시 바쁘게 돌기만 하던 삶에서 한 번쯤 이렇게 멈춰 설 수 있다면,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물 위에 비친 회전목마는 마치 거꾸로 그려진 기억 같았다. 이곳에서의 멈춤은 후퇴가 아니라, 내면의 방향 전환이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랜 시간을 멈추어 서 있었다. 밝은 동화의 세계와 어두운 기계적 구조물 사이에 선 한 사람. 현실과 환상, 그리고 이상과 시스템. 그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선택한다.
두 명의 소녀가 있다. 위의 소녀는 동화 속을 바라보며 웃고 있고, 아래의 소녀는 물결에 일그러진 채 바라본다. 어쩌면 둘 다 나일지도 모른다.
“삶은 아름다움과 기계 사이에서 매일 흔들리는 균형이다.”
— 작가의 말
이 장면은 차라리 꿈 같았다. 커다란 유리등 안에 담긴 달빛, 흐릿하게 뒤틀린 불꽃, 하늘 위를 수놓은 천막의 조형물들. 아이가 처음 서커스를 보며 느꼈던 황홀함, 그리고 어른이 되어 그 마법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한 장면에 포착되어 있었다.
“기억은 언제나 조금 과장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찾아가고 싶어 한다.”
이 작품 앞에선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말이 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은 유치한 상상이 아니라, 진심에서 비롯된 희망 같았다.
“당신의 상상은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은 당신이 살아 있음의 증거다.”
유니콘이 서로를 마주 본다. 마치 서로의 기억을 나누듯. 어쩌면 하나는 현실의 나이고, 하나는 내가 잊고 살았던 내 안의 아이일지도.
빛은 길이 되고, 길은 내면으로 향한다. 이 작품은 ‘길 위의 감정’ 그 자체였다.
마지막 그림은 눈으로 본다기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풍경이었다. 찬란한 오로라처럼 피어오른 색채는 마치 “괜찮아, 너는 너의 빛을 따라가면 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림 앞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정리되었다. 그림 속 몽환과 동화가 사실은 이토록 현실적이고 열정적인 붓질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하얀 셔츠를 입은 작가는 깊은 몰입 속에서 노란빛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림이 아닌, 살아 있는 장면 같았다.
환상의 숲을 지나며 우리는 잊고 있던 감정을 마주하고, 어린 날의 자신을 안아주고, 다시 삶의 무대 위로 올라설 용기를 얻게 된다.
“상상은 현실의 반대편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