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누구나 하나쯤 키우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

제발, 빨리 어른이 되게 해 주세요.


나는 서울 불광동에서 태어났다.

여자 아이인데도 얼굴이 너무 까맣고, 계속 울어대는 통에 예쁘다는 말보다는 별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 때 사진들이 전부 자지러지게 우는 모습뿐이었다.


그런데 한 살, 두 살 점점 커가면서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고, 서울깍쟁이가 되어 예쁨을 많이 받게 되었다.



하얀색 꽃무늬 공주 원피스를 입고 할아버지 앞에 가면, 할아버지는 항상 무릎에 앉혀 놓으시고 내게 바비인형보다 더 공주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 삼촌이 덩달아 말한다.


“가연아, 우리 가연인 크면 누구랑 결혼할 거야?”


“음. 글쎄. 모르겠는데?”


“삼촌이랑 결혼을 해야지. 우리 가연인 삼촌 제일 사랑하잖아.”


“아니야,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우리 아빠야!”


아빠. 아빠가 갑자기 보고 싶다.

그런데 아빠는 우리랑 같이 살지 않고, 아빠를 만나는 날은 엄마가 아닌 다른 아줌마를 만난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아빠를 닮은 다른 아저씨가 있다. 장난감도 많이 사주고, 목마도 태워주면서 나를 참 많이 예뻐해 주신다. 나와 놀아 주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마음을 주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저씨는

엄마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와 단 둘이 기차 여행을 했다.


어디를 가든 아저씨랑 함께 갔는데

이번엔 엄마랑 나, 단둘이 간다.


긴 시간이었다.

4시간이 넘는 지루한 기차에서 계란을 먹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게 된다.


오른팔을 창틀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엄마는 생각이 많은 가 보다. 잠을 자는 건 아닌데 코 끝이 빨갛고, 슬퍼 보이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기차역에 내려서 우리는 낯선 집에 가게 되었다.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라 이곳은 화장실도 불편하다. 엄마는 내게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큰 아빠, 큰 엄마 그리고 나와 같은 또래인 사촌 두 명이다.


나는 피곤해서인지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엄마와 큰엄마는 심각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를 찾았는데 엄마는 없었다.



대신 베게 위에는 편지 한 통이 있었다.


그걸 들고 방문을 열어 어제 인사했던 사람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분들의 표정을 보고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서울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왜 엄마가 나를 여기에 두고 갔는지 혹시 보고 싶으면 연락은 할 수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새벽이면 할머니, 할아버지, 큰 아빠, 큰 엄마 모두 일찍 일어나서 빵을 만들고 일을 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울기만 하다 며칠이 지나니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옷 가지들이 택배로 왔고, 나는 낯선 이곳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왜? 내가 왜 너를 키워야 하는데?”


우체부 아저씨가 주고 간 국민학교 입학통지서에서 큰 엄마는 나를 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억울했다.


왜 가만히 있는 내게 소리를 지르는지 말이다.


심지어 내가 이곳을 선택한 것도 아닌데 엄마도 없는 이곳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싫었다. 서울에서는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말을 했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이 집에서 왁자지껄한 순간이 조용해질 때는 드라마를 보는 순간이다. 여기에 계시는 할머니는 유독 드라마를 좋아하신다.할머니 옆에서 같이 ‘아들과 딸’ 드라마를 보니 왠지 모르게 내 이야기 같았다. 아들을 귀하게 여기고, 딸에게는 차별하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와 나이가 같은 사촌동생은 100일을 늦게 태어났지만 장손이라는 이유로 할아버지가 많이 예뻐하신다. 생일이 되면, 할아버지께서 직접 케이크를 사서 하루 전 날 냉장고 위에 올려 두시고, 축하한다는 말을 동네 떠나가듯 말씀하신다.


집안일은 손 끝 하나 데지 않고, ‘할머니, 물!’이라고 하면 무릎이 불편한 할머니는 친히 물까지 가져다주신다.


반면, 나는 할머니의 막내 딸쯤 되는 듯하다.

청소, 빨래, 빵 포장, 설거지를 모두 해야 한다.


가끔 ‘왜 내가 이런 걸 해야 하는 거지? 왜 쟤들은 하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하던 일을 멈추고, 반항을 하고 싶다.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면 명절날에 큰 소리가 난다. 키워주는 은혜도 모른다며 친척들은 나를 비난하고, 어쩌다 한 번씩 오는 아빠는 매질을 시작한다. 아홉 번 잘하다 한번 하지 않았을 뿐인데 나는 그저 못된 아이가 된 것이다.


나는 그냥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 건지 아니면 다른 무엇의 차이가 만든 차별인 건지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집 밖을 나선다.


“안녕하세요!”

동네에서 어르신들을 만났다. 이분들은 나를 보며 늘 같은 말을 하신다.


“니는 너희 할머니, 할아버지, 큰 엄마, 큰 아빠한테 정말 잘해야 된다. 세상천지 고아 될 뻔한 아이를 이레 거둬서 키워 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데이. 항상 ‘고맙습니다’하고, 말 잘 들어야지. 은혜를 모르면 그건 사람이 아닌 게야.”


“네? 아.. 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정말 많은데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고, 그저 내 편이 없는 곳이라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입학해서 학교에 가니 친구들도 있고, 나를 반듯한 아이로 생각해 주시는 선생님도 계신다. 그래서 나는 가정환경조사서에 거짓으로 예전 가족을 썼다. 튀는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하면서 이내 모든 사실이 드러났다. 사촌들은 관계에 ‘손자’라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동거인’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선생님들도 나를 가엽거나 특별히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아이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나는 더 보란 듯이 씩씩하고, 아무 일 없듯 웃으며 학교 생활을 했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씩 보름달이 보이면

옥상에 올라가서 두 손을 모으고 말한다.


"빨리 어른이 되게 해 주세요."


그렇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어른이 되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서 그리고 좋은 사람들 틈에서 사랑을 가득 느끼고 싶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빨리 어른이 되게 해 주세요. 정말 어른이 되고 싶어요."     

이전 02화 혼란이, 혼돈이 되던 어느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