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진짜 긍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해요.
저는 어릴 때 일어났던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그 일에 대해
원망하거나 과거를 쫓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그건 제 자신이 저도 모르게 ‘얼음’이 되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봉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거짓된 합리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잘 봉인되어 있다고 생각한 그날의 일은 살면서 심심찮게 고개를 들거든요.
어리석게도 누군가 호감을 보이면 ‘나처럼 버림을 받은 아이를 좋아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누군가와 갈등이 생기면 ‘나는 원래 인연이 부족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렵사리 간 대학에서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쉽게 좌절감을 느꼈는데 그건 어린 시절부터 힘들었기 때문에 삶의 동력을 잃은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일을 하면서 겪는 다양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유독 부당함을 느꼈어요.
그런 저의 알게 모르게 자신을 잠식해 오던 생각들은 코로나 백신 후유증으로 3년을 투병하면서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해?’라는 질문으로 원망을 더 키워 갔죠.
늘 투쟁하고 쟁취해야 하는 삶에 허덕이면서 더 이상 감정이 감당이 되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더 이상 못하겠다’는 외침은 강제로 쉼을 허락했어요.
그렇게 제게 비로소 긴 시간이 주어 졌을 때 저는 알게 되었어요.
용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함부로 대했던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과거를 묻어 버리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만으로도 현재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되었어요.
사실, 중학교 때 저보다 성적이 조금 낮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상업고등학교를 진학해서 은행에 취업을 했어요. 그리고는 1년 뒤 산업체로 70%의 장학금을 받아서 야간대학을 갔고, 20대 후반에는 작은 건물도 하나 갖고 있다고 들었어요. 참 부러웠어요.
저는 혼자의 힘으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캠퍼스의 낭만과 그 시절의 젊음을 많이 희생했었거든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나라도 더 많은 일을 했고, 공부를 했어요.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고집부린 선택은 늘 스스로에게 어쩔 수 없음을 강요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선택을 한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죠. 심지어 코로나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데 그것을 선택한 것조차 저였어요.
어린 시절 엄마가 떠난 그 사실이 아프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돌보지 않았던 마음은 한 번의 회피를 습관처럼 만들어 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런 습관은 지금의 저를 만들어요.
유대인들은 살인과 명혜훼손은 참회가 가능하지만, 용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대요.
또,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마트 간디 Mahatma Gandhi는 ‘약한 자는 절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만큼 용서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의 자신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어요.
우리는 절대 과거를 단절한 채 현재를 바꿀 순 없어요.
용서를 하게 되면 마음 안에 있는 화가 풀리고, 화가 풀리면 인생은 뜻하지 않게 풀리기도 해요.
지금껏 살아보니 성장의 속도는 성숙의 깊이와 꼭 같지는 않았아요.
우리는 지식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멈춤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을 다듬을 수 있어요.
선택을 하게 하는 생각의 정리가 있어야 다른 선택을 하게 되고, 다른 선택은 다른 행동을 만들어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죠. 이것이 반복이 되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 다른 운명을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좌절에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슈퍼맨이 지니는 대단한 힘이 아니라, 자신만의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의 멈춤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멈추면 자신 안의 진짜 긍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
자기 자신에게 멈춤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