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그런데 결혼했더니 날마다 물만 묻히더라. 설거지할게 좀 많아야 말이지.
남편한테 따졌더니 뭐라 하는 줄 알아?
세수할 때는 어차피 물묻혀야 하잖아 이러는 거 있지.
어렸을 때 본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사다. 뭔가 웃긴데 슬픈. 어릴 땐 웃기기만 했지만 말이다.
설거지가 그렇게 힘든가. 간혹 주말이나 명절 때 엄마를 도와 사촌 언니와 설거지를 했는데 일을 잘 도운다며 칭찬을 받았다. 세제 거품에 뽀독뽀독 씻겨가던 그릇의 촉감도 좋았고, 거품 목욕 하는 것처럼 담겨 있는 컵을 보는 것도 좋았다. 꽃분홍도 아니고 연분홍도 아닌 오묘한 분홍색 고무장갑은 그저 신기방기였다.
엄마와 할머니가 메인으로 하셨던 일이
결혼을 하고 내 살림을 시작하면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게 되었다.
세상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것인지 집안일은 점점 여자의 몫이 되어 간다.
아니 어쩌면 신혼 때 소꿉놀이를 하며 잘 못하는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몸에 배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은 군대를 다녀와서 그런지 역시나 티셔츠 개는 것도 킬각이고 물건 정리도 짜임새 있다.
게다가 음식 솜씨 좋은 어머니를 닮아 요리도 훨씬 잘한다.
그럼 남편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내는 그만큼 더 벌어야 하겠지.
신혼 초 어느 정도 분담하던 일이 육아 휴직 후엔 오롯이 내 일이 되었다.
설거지와 빨래, 청소.
고장 난 가전제품 수리나 전등 달기 에어컨 청소 같은 굵직한 일은 열외로 한다.
화장실 청소는 서로 분담하지만 남자 셋의 댄디함(?)과 스멜을 못 참는 내가 주로 한다.
캠팡가서 텐트 설치와 요리도 남편의 몫이다. 언제나 설거지만 담당한다.
이러고 보니 남편도 하는 집안일이 많은 것인가.
제사 때나 명절 때 시댁에 가면 오로지 하는 것은 설거지.
마당에선 어머님이 청소 중이고 남편과 시아버님은 밭에서 일하거나 주로 연장이 필요한 일을 한다.
설거지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정도이다.
'부지런하게 살며 글을 가까이'라는 가훈에 걸맞게 부지런히도 일하신다.
아들들이 커가면서 설거지를 시키기도 한다.
그래야 나중에 부인한테 사랑받는다며 조언도 해준다.
설거지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아이들이 아빠가 되었을 때 권위적이 아닌 멋진 아빠이길 바란다.
자기 전 책을 읽어줄 때도 꼭 베드타임 스토리 읽어주는 아빠가 되라고 말을 해주었다.
사실 요리보다도 설거지가 더 재미도 있고 편하기도 하다.
양이 많은 날은 지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개운하고 재미있는 집안일이다.
저녁 설거지를 하다 보면 30~40분은 훌쩍 지나가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를 계기로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 식기세척기 사자."
굳이?
뭐 하러?
남편의 지론은 설거지하는데 저녁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되어 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간단한 요리라도 하고 나면 그에 따르는 부산물이 많다는 것.
시간을 벌자.
오케이. 당신이 산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어. 일 년 전 만난 식기세척기는 우리에게 신세계를 가져다주었다.
그릇만 살짝 헹궈서 넣으면 살균, 건조까지 오케이.
플라스틱 제품과 나무 제품만 피해 주면 된다. 우리 가족의 시간을 벌어준 건 당연지사고 끝나면 세탁기처럼 울리는 경쾌한 소리까지 상큼하다.
여유 있는 시간 확보로 집안일도 확실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모든 일엔 장단이 있던가. 문명의 이기는 또 다른 퇴화를 가져온다.
첫째, 나를 제외한 가족들의 설거지 기회 상실.
아들들에게 집안일을 시켜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변함없으나 점점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고 나머지 물품들을 엄마가 빠르게 처리해 버리니 이 또한 생각지 못했던 단점이다.
둘째, 엄마의 합법적인 유튜브 시청 타임 상실.
운전 중이거나 걷는 중에도 유튜브 대학을 통해 2차 힐링 중인데 뽀도독뽀도독 그릇을 닦으며 보는 유튜브의 맛은 얼마나 좋게요.
한참 신이 나서 쓰던 식기세척기를 요즘은 가끔 쉬어준다.
뜨거운 물의 맛을 느끼면서 그릇들을 일차로 헹군다.
북유럽 주방 느낌 낸다며 산 수세미에 친환경 세제를 묻혀본다.
고무장갑은 스테디셀러 분홍 장갑 말고 미색이나 무채색의 장갑으로 바꾸었다.
고리까지 달려있으니 위생도 굿잡이다.
접시, 밥그릇, 숟가락, 컵까지 뽀독뽀독 닦아준다.
보글보글 하얀 세제가 거품 목욕하는 것처럼 뽀얀 느낌이다.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틀어놓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거지를 한다.
"어? 왜 식기세척기 안 써?"
"응, 그냥. 설거지하고 싶어서."
"오, 이제 설거지는 힐링의 수준인 거야?"
"좋을 대로 해석하시우, 요즘 나는 그냥 손설거지가 하고 싶어."
빌트인 식기건조대는 너무나 작지만 다 헹군 그릇들을 차곡차곡 올려놔본다.
하얀 그릇들이 뽀도독하니 이쁘다.
오장육부 하나씩 꺼내어 다 씻어놓은 느낌이랄까.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갈대 같은 마음이지만 설거지와 식기세척기의 콜라보는 한참은 더 계속될 것 같다.
아들들아, 주말엔 너희 차례야.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pixab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