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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Nov 07. 2024

공허한 삶 속에서 마주하는 허황된 사랑의 말로.

영화 <아노라> 리뷰


션 베이커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 <아노라>는 2024년 11월 6일 개봉한 영화이다. 제77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으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작품이다. 지난 영화제에서 시간이 맞지 않아 볼 수 없었는데, 극장에서 바로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션 베이커 감독의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트립 댄서로 일하고 있는 아노라. 그녀는 러시아 재벌 2세인 이반과 만난다. 그녀와의 관계가 만족스러웠던 이반이 그녀를 집에 초대하고 일주일 동안 여자친구가 되어달라고 한다. 정해진 일주일이 끝날 무렵 이반은 아노라에게 청혼하고 그 물음을 되물어보던 아노라가 그를 승낙하며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재벌 2세였던 이반의 부모님이 아들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혼인을 무효화시킬 소송을 진행할 것을 지시한다. 겁에 질린 이반은 아노라를 버리고 도망치고, 이반을 찾아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던 아노라는 그들과 함께 이반을 찾아 나서게 된다.



영화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아노라의 해피엔딩으로 마침표를 찍었을지도 모르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는 결혼에서부터 시작되며 상황은 급변한다.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아노라는 끝없이 사랑을 확인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의 참혹함을 몸소 체감해야 했던 아노라의 표정이 점차 굳어진다. 환상적인 사랑을 다루던 초반과는 달리 후반은 지극히 현실적인 절망의 순간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금방 깰 꿈처럼 달콤하고 짧은 사랑의 순간들을 돌이켜 볼수록 현재의 절망은 뚜렷해지고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예상 가능한 결말이었다.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의 만남은 매우 짧았다. 대화보다는 육체적 관계가 주를 이뤘고, 책임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아니었다.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랑은 무책임함에 불가하다는 것을 보여주듯 그들의 관계는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화려함으로 가득한 풍경과는 대조되는 차가운 법정의 모습이 보이며 그들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은 결국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느냐 이지만 아노라의 직업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세계였다. 그녀는 결국 이반의 세계에 속할 수 없었다. 그가 바라던 해피 엔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노라는 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하는 걸까. 그럴수록 더할 나위 없는 절망만을 느끼게 될 것이 뻔한데 말이다. 수식어가 붙지 않은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지가 되어야 할 이반은 도망쳤고, 마주했을 때조차 부모님에게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며 아노라를 외면한다. 아노라는 그리고 완전히 무너진다. 애니라는 당당한 가면 뒤에 숨어 있던 아노라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노라'는 석류, 빛, 고귀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진정한 '미국인'이 될 수 있는 애니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며 자신의 몸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지불받는다. 모두에게 쾌락을 건네어주는 만큼 그 공허함은 그녀를 지배하고 허무를 채울 곳이 없다. 그저 몸을 웅크릴 뿐이다. 아노라의 이름은 어떤 사람 앞에서 불리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고르는 워리어.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노라가 궁지에 몰리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다. 아무 의미 없다는 아노라의 이름의 뜻을 검색하며 '성매매 종사자'라는 수식어가 아닌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람으로 봐줬다. 그녀가 겪은 사랑은 대개 계약과 조건으로 이루어진 관계였으며 대가 없는 사랑을 온전히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편견'에 의해 완성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는 다르게 보인 이미지에 의해 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고착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주인공인 '아노라'는 성매매 종사자로서 '존중'받기 힘든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영화 속에 많은 노동자의 모습이 나오면서 그 모습은 더욱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성매매 종사자들을 위한 영화라기엔 뭔가가 좀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 영화는 성매매에 대한 더 깊은 통찰보다는 표면적인 묘사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매매를 노동으로 칠 수 없을뿐더러 윤리적 문제를 배제하고 바라보기엔 너무 많은 문제가 걸린다. 물론 '이고르'라는 인물을 배치하여 영화의 주제를 묵직하게 담아내려 노력했으나 단발성으로 그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엔딩에서 더 나아갔으면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 이야기는 아노라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보다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녀의 감정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이반의 세계에 속하지 못해 슬픈 건지, 감사함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육체적 관계뿐이라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인 아노라의 이야기를 통해 한 사람의 삶에 가려진 여러 가지 얼굴과 감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행복이 아닌 끝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절망적인 순간의 연속이지만 왠지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온다. 단순하게 처리해도 될 일들을 실수를 반복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는 모습 때문이었다. 이처럼 션 베이커 감독의 모든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옳든 그르든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자발적 선택으로 인해 끊임없이 바닥으로 곤두 박칠 치는 그들의 인생마저도 그대로 바라본다. 이번에도 디즈니랜드는 못 가는 주인공들.. 소외되는 이들을 애정하는 마음으로 그렸지만 장면의 한계 때문인지 지극히 타자화된 채로 남는다. 그래서일까. 이번 영화는 많은 웃음을 주기도 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해결되지 못한 의문들이 불쾌감을 자아낸다. 화려한 부분과 특이한 소재를 걷어내면 무엇이 남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머리가 멍해진다. 가득 찬 화려함에 쉴 새 없는 여백을 채웠지만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의 엔딩에 왠지 모를 허탈함을 느끼며 이 영화에 나오는 누구의 시선도 아닌 이고르의 시선에 멈추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해진다. 어쩌면 그는 관객이 답을 찾기보다는 더 많은 질문을 품은 채 극장을 떠나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노라>의 불편한 질문은 우리가 꼭 마주해야 할 현실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이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잔혹하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외면해 온 사회의 어두운 이면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살아가는 방식이 그릇된 것이라 할지라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영화 <아노라>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고통과 인간적인 면모를 온전히 바라보기를 바라며 우리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제76회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이 <추락의 해부>였고, 경쟁작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칸의 선택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락의 해부>는 탄탄한 이야기 전개와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었고,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노라>도 화려한 이미지와 신박한 소재, 마이키 매디슨의 연기의 압도적인 연기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작품의 깊이와 메시지의 전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느껴졌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를 보던 중, 극 중 이고르 역으로 나왔던 배우의 얼굴이 익숙했는데 알고 보니 6번 칸과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 출연했던 배우유리 보리소프였다.


언급된 영화 ⤵


추락의 해부


https://brunch.co.kr/@mindirrle/389


신성한 나무의 씨앗


https://brunch.co.kr/@mindirrle/533


6번 칸


https://brunch.co.kr/@mindirrle/237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https://brunch.co.kr/@mindirrle/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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