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명상 전 이야기
이상하게 내 지인들 중에는 자살한 사람이 많다. 대부분은 목을 매달아 죽었고, 한 명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렸다. 나는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고 슬펐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정한 그 마음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는 게 낫지 않아? 죽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데. 죽으려는 그 용기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작은 가시 하나만 피부에 박혀도 얼마나 아픈데 이 목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스스로 선택한다니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살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긍정적인 편이었다. 어린 시절 한 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인이자 엄마를 향해 폭언과 폭행을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아버지를 그래도 ‘좋은 아버지’라고 스스로 세뇌시키려고 애를 썼다.
심리학에서는 어린 시절 아무도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든 감정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회피로 지나친 긍정성이 작동할 수 있다고 한다.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들어온 아빠의 폭력과 폭언에 대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와 원망, 슬픔 등의 감정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부정적인 감정은 숨기고 행복한 척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스스로 느꼈던 것 같다.
이렇게 만들어진 긍정성은 대학을 거쳐 첫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점 더 커졌다. 사회생활 역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연달아 나타나자, 내 인생에도 우울증이란 녀석이 찾아왔다.
첫 직장에서 ‘최저실적 미달성’을 이유로 해고당한 뒤에 내 인생에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지인의 모임에서 알게 된 사장님과 두 번째 회사의 인연을 맺었다. 티몬, 쿠팡과 같은 회사가 창업을 하던 시기로 할인 쿠폰 어플 서비스를 런칭한 스타트업이었다. 대기업의 창업투자 파트에 있다가 퇴사를 한 대표는 본인이 만든 회사가 당연히 투자를 받을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투자 유치에 실패했고, 다섯 달만에 직원들의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마지막 월급을 노트북으로 받고 퇴사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영업을 하다 만난 인연이 세 번째 회사로 이어졌다. 입사 후에 회사 상황이 변하면서 내가 할 일이 없어졌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나의 의지가 아닌 외부적 환경으로 인한 변화가 이어졌다.
또래의 친구들은 회사를 꾸준히 다니면서 각자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해 내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회 어느 곳에도 내가 서 있을 자리는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내 욕망과 달리 실제 내 삶은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거센 파도가 밀어내는 것 같았다.
융은 외부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외적 자아인 페르소나와 자아를 지나치게 동일시했을 때 전체정신인 자기로부터 멀어지며 그로 인해 우울증과 같은 신경증이 생긴다고 했다. 우울증이 찾아온 20대 후반 당시 내게 가장 중요한 페르소나는 사회의 구성원이었다. 사회적으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럴듯한 가면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내가 쓸만한 가면이 없었다. 가면을 찾을수록 나는 비참해졌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헷갈릴 뿐이었다.
매일 술을 마셔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매일 밥만 축내는 식충이가 된 것 같았다. 가슴은 답답했고, 툭 하면 ‘세상에서 제일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눈물샘을 건드렸다. 이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자살’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떠올렸다.
‘저 달리는 차 속으로 뛰어 들고 싶다’
횡단 보도에 서 있거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달려 오는 차를 향해 내 몸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
‘에이. 기왕 죽을 거면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치진 말자. 내가 뛰어 든 차의 운전자는 도대체 무슨 잘못이야.’
그리고 다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잘 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다.
목을 매는 것,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
차에 연탄가스를 피워 놓는 것,
수면제 수백알을 한 번에 털어 넣는 것.
내게 우울증이 오면서 자살 생각을 자주 했지만 한 번도 시도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 때 처음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마음에 아주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책 ‘내감정에 잡아먹히지 않는 법’에서 분노의 가장 큰 원천은 ‘내가 너무 가혹하고 심한 고난을 거치고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삶이 참으로 불공평하고, 너무나 고통스럽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렵고 부당하게 보일 때가 있으며 다른 이들이 겪지 않는 고난을 두 배, 세 배 경험하고 있을 때 이런 상황이 더 억울하게 느껴지는 법이라고 말이다.
내가 자살을 생각하던 때 바로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바로 나에 대한 엄마의 신뢰가 깨진 것이었다. 첫 직장 생활 5년을 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용돈을 준 적이 거의 없다. 엄마는 본인에게 용돈을 주지는 않지만 돈은 꼬박 꼬박 모으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보험 영업 사원이었기에 ‘영업 실적만큼’ 돈을 벌었다. 사회 초년생으로 주변에 직장인이 별로 없어 영업을 할 대상이 적었다. 게다가 내향적인 성격으로 영업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다.
실적이 적은 만큼 매달 통장에 찍히는 급여도 적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망고객을 발굴하기 위해 계속 사람을 만나야 했다. 사람들을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신용카드가 점점 늘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매달 내야 하는 카드 값도 적정선을 넘었다. 카드값을 메우기 위해 가입했던 보험의 약관 대출을 받았고, 그것마저 어려워지자 보험을 해약했다. 더 이상 해약할 보험도 남지 않게 되자 결국 대출을 알아봤다. 하지만 정규직 또는 계약직 근로자가 아닌 파견직 보험인에게 대출을 허락하는 1금융권은 없었다. 결국 2금융권도 아닌 연 40% 이율의 3금융권의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
카드값과 대출금의 합이 1천만원 정도에 육박했을 때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엄마에게 현재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고 돈을 빌려 카드값과 대출을 정리했다.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도 아침 7시면 일어나서 출근하는 딸이 기특해서 그저 잘 하려니 믿고 있었던 엄마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나에 대한 엄마의 신뢰는 한 번에 무너졌다.
분석심리학자 이부영 교수는 '부모, 친구 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처럼 느끼는 사건'이 큰 고통이며 버림 받은 집단에 대한 의존심이 강할수록 버림받은 고통과 소외감은 그 사람을 자살충동이나 죽음에까지 내몰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엄마에게 신뢰를 잃고 인정받지 못하게 된 이 사건은 내게 매우 큰 고통을 주었다. 엄마는 스스로 알아서 잘 하고 있을거라 믿었던 큰 딸에게 배신을 당한 뒤 잔소리가 늘었다.
“밥은 먹었니.”
“(밖에서 전화를 하며) 너 또 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나갈거지?”
“도대체 일은 언제 할거니? 다른 집 애들은 다 좋은 회사 다니면서 승진하고, 결혼도 하는데…”
엄마의 잔소리는 잃어버린 나의 신뢰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이는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집안 곳곳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엄마의 잡동사니들’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베란다의 식물들’
‘집안 곳곳에 꼬릿꼬릿한 냄새의 주범인 정체불명인 엄마가 만든 음식’
무엇 하나 내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내 인생에 두 번째 사춘기가 찾아온 이때, 엄마의 갱년기도 시작됐다. 엄마와 나는 매일 부딪쳤고, 엄마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엄마가 내게 말 한 마디를 하면 ‘듣기 싫다’는 마음이 올라왔고, 두 번째 말부터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나는 더 듣고 있다가 화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당장 책가방을 가지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융은 사람의 마음에는 우리가 알아차리는 ‘의식’ 너머에 ‘무의식’이라는 깊고 넓은 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헤어나지 못할 때, 특정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어떤 강력한 감정-호감이나 미움 등-을 느끼는 때,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서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없을 때가 바로 무의식을 투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좋다/나쁘다, 예쁘다/못생겼다, 비싸다/싸다’ 등과 같이 우리가 판단하는 대부분 역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인 무의식이 투사된 이미지다. 하지만 모든 무의식이 투사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무의식의 콤플렉스 뿐만 아니라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내가 지니고 있는 좋은 성격까지 다양하게 투사로 나타난다. 분석심리학 이야기를 쓴 이부영 교수는 이런 투사 현상이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깨달을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투사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의식을 인식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화가 났던 내 마음을 본다. 무의식의 어떤 마음을 엄마에게 계속 투사하고 있었을까?
결국 나를 계속 ‘자살’까지 생각하게 만든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것은 ‘지금의 나’ 혹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지 않는 ‘내 마음’이었다. 인정하지 않는 건 비단 스스로에 대한 것 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장애인’이었던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빠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고 굳게 믿었다.
또한 나의 관심을 항상 ‘내가 해낸 것’이 아닌 ‘내가 하지 못한 것’에 두었다. 그래서 늘 만족하지 못했고,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행복한 척’하며 살았다. 이 마음의 이면에는 ‘완벽함’에 대한 갈망이 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만족할 수가 없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인간은 자기 마음 속에 인생 방식을 만들어 놓고 그 방식을 고정하고 강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융의 무의식, 불교에서 말하는 ‘알라야식과 업(까르마)’과도 일맥 상통한다. 엄마에게 투사했던 마음을 만든 무의식,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완벽에 대한 집착을 인식하고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마음을 사용하고 있었다. 행동에도 습관이 있듯이, 마음에도 습관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해오던대로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마음의 습관이 그렇게 굳어져 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무엇을 하자고 얘기하면 나의 뇌회로는 가장 먼저 ‘그것이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았고 ‘비판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나도 모르게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마음의 습관을 인식하고 난 후부터 의도적으로 생각을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전화위복이 되기 위해 이런 일이 생긴거야.’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칭찬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작은 실천 하나에도 ‘잘 했어.’ 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과거의 경험이 아닌 그 경험을 각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아들러의 말처럼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