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학교(연세대학교)때문인 것도 있지만 경영학과라는 특성 때문인지 외고 및 자사고출신이 1/3 이상, 강남 8 학군 출신이 1/3인 그야말로 엘리트 집합소였다.
명품 하나씩은 갖고 있고
갖고 싶은 건 뭐든 살 수 있으며
강남의 커다란 아파트에 살고
방학마다 유럽여행을 가는
부잣집 친구들이 가득한 학교,
그리고 나.
"하.. 노트북 사고 싶다."
반방(동아리방 같은 것)에서 나오며 옆에 있던 동기에게 한숨 섞인 말을 무심코 흘려보냈다. 과외하며 버는 돈으로 아슬아슬 살아가는 내게 목돈이 필요한 노트북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동기가
"응? 노트북? 사! 사고 싶으면 사야지~"
라고 대답했던 것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고작 노트북 따위를 돈이 없어서 못 산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세상에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게 되었지만 보잘것없는 나의 상황에 대한 열등감을 쌓기에도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점점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격하시키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행복이나 자신감과는 조금씩멀어지고 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일생일대의 목표를 이루고 들어간 곳엔 꿈과 희망이 아닌 좌절과 우울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일한 희망, 남자친구
그런 상황에서 남자 친구라는 존재는 어찌 보면 나에겐 술과 같은 존재였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울한 현재를 잊을 수도 있고, 남자친구와 있을 때만큼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듯 남자친구가 사라지면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일시적 최면과도같았다.
그래서일까?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 상처받아도 정리하지 못하기를 반복, 또 반복했다. 내가 너무 매달려서 그런 거다,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니어서, 내가 고급스럽지 못해서 그런 거라며 나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당시의 내겐 남자 친구가 있다는 자체가매우 중요한 일이었기에 다음 상대를 만나기까지의 빈틈이 두려워 헤어지지 못하다가 다른 사람이 생기면 헤어지는 일명 '환승연애'를 반복했다.
나, 헤어지려고 연애하나?
그러다 20대 후반이 되니 남자 친구가 없는 시간이 늘기 시작했다. 결혼 적령기가 다가오니 다들 상대를 만나는 데에는 신중했고, 헤어짐을 결정함에는 주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정말 진심인 것 같은 친구를 만났다. 하지만 몇 달 후엔 캐나다로 돌아가야 하는 한국계 캐나다인. 그때 당시엔 무작정 방법이 있겠지 하며 생각했지만 결국 그 친구는 만난 지 6개월 만에 예정대로 캐나다로 돌아갔고 고통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되었다. 끊어야 함을 알면서도 그 끈을 놓치는 게 싫어 정말 힘겹게 3개월이란 시간을 견디다결국 헤어지고 우울증이 찾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20대 후반부터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할 사람들만 만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관계에 대한 근본적 불신 때문일 수도 있고(결국 나를 다 떠나갈 거라는 부정적 믿음) 그저 눈앞의 외로움을 참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다.
어쩌다 혼자가 되어보니...
누군가를 만나는 건 전처럼 쉽지 않았고 혼자임을 인정해야만 했지만 나에게 전부나 다름없는 남자 친구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혼자인 시간을 채워가야 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취미생활에 열중하고.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할 일이 많으니 우울할 틈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던 일을 잠시 멈추어 보았는데,
'어, 혼자서도 지낼만하네.'
처음이었다. 혼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 것은. 더 많은 친구가 생겼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게 되었고, 내가 갖고 있던 매력이 무엇인지 하나씩 발견해 나갔다.
이때 처음으로, 자존감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자존감.
아직은 껍질뿐인, 톡 하면 찢어져 나갈 수 있는 얄팍한 자존감이었지만 그 얇은 보호막 하나도 없던 나에겐 처음 가져 보는 안정감이었다.
혼자 있으면 늘 불안하고 버려진 것만 같았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구나. 내가 조금만 먼저 다가가면 받아주는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고작 남자 하나 없다고 스스로를 비하해 왔던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동안 소홀했던 존재들에 집중하니 드디어 혼자임을 인정할 수 있었고 혼자여도 괜찮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은?
'나'라는 자아가 강해진 지금, 나를 상처 주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거나 참지 않는다.내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들은 빠르게 무시하고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또 내 주변사람의 능력이 나의 평가를 높여줄 거라고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내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나는 왜 좋은 사람인가?
내가 멋있는 이유들이 뭐지?
나 하나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멋있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누구와 연애 중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해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내 행복을 결정할 절대적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갔다.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자신감과 자존감은 동의어가 아니다.
그 두 가지는 함께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매력적일 자신은 있었지만 자존감은 없었다.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그러던 내가, 자존감이 생겨나고 드디어 '나'임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만났다.
우울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 모두 '혼자'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세상에 나는 오직 혼자뿐이야.'
라는 것과
'인생 결국 혼자 사는 건데 뭐!'
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나를 위해줄 사람은 반드시 세상에 있다는 믿음은 가져야 하고, 내 인생에 필요 없는 사람들까지 붙잡고 살지 말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