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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솔캠, 어쩌다 혼산

22.09.

by 해리안

지난 주말 여느 때처럼 일요일 늦게 서울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내비게이션으로 조회를 해보니 길이 완전 정체 중이라 5시간 넘게 걸릴 것으로 보였다. 8월 광복절 연휴의 마지막 날인 탓이었다. 돌아갈 길이 깜깜한데, 와이프가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양양 공항에서 김포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가 단돈 1만 원에 판매 중이라는 것. 플라이 강원은 양양공항에 취항한 유일한 항공사인데, 양양-김포 노선은 1년 중 서퍼가 가장 많이 몰리는 8월에만 잠깐 판매를 하였었다. 그나마다 판매가 잘 안되는지, 특가 할인 중이었던 것. 유류할증료를 포함하면 조금 더 비싸지지만 우리 네 가족은 공항에 차를 주차해 두고 과감하게 비행기로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주, 역대급 태풍 한남노가 지나가면서 양양에 강풍이 몰아쳤다. 예보에서는 20~30m/s의 강풍이 고지되어 있어서, 산속에 있는 카라반과, 바닷가 공항 주차장에 있는 견인차가 모두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은 수요일에 회사가 끝나고 나 혼자 양양으로 가서 차량을 점검하고 회수해 오기로 했다. 이렇게 내 생애 첫 솔캠이 얼떨결에 성사되었다.


수요일 저녁 7시 반 비행기였는데, 퇴근을 6시 반이 돼서야 했다. 사무실에서 공항까지가 20분 거리이기는 했지만, 정상적으로는 비행기를 탈 시간 여유는 아니었다. 정말 다행히도 공항 보안 검색에 사람이 없었던지라 비행기 출발 20분 전에는 도착을 했다. 평일 저녁에 서울에서 양양으로 비행기로 이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전세 비행기를 타보았다. 항공사가 이 큰 비행기를 끌면서 적자가 나겠다 싶어 걱정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타깝게도 양양-김포 노선은 이 해가 마지막 운항이었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캠핑은 이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40분 정도 지나니 양양공항에 도착했다. 분명히 6시까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8시에 양양에 와있다니!


옷 빼고는 아무 짐 없이 온 거라, 먹을걸 좀 사가려고 양양 시장에 들렀다. 양양은 지방 도시라 8시가 되면 마트나 식당들이 거의 다 문을 닫는다. 평소 즐겨 찾던 곳은 가지를 못하고 헤매고 다니다가, 포장이 되는 부대찌개 가게가 있어서 다행히 식사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마트에서는 맥주 한 캔과 마실 물정도만 사서 카라반이 있는 캠핑장으로 이동하였다. 태풍 한남노가 쓸고 지나간 자리를 걱정했는데, 너무도 다행히 별 피해 상황이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날씨가 아주 좋았다.



배가 고파 급한 대로 테이블 의자와 버너만 꺼내놓고 내 인생 첫 솔캠, 첫 저녁 식사를 즐겼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캠핑은 기본적으로 저녁 상을 푸짐하게 차려내야 하고, 저녁 식사 후에도 설거지에, 아이들 케어에 바쁨의 연속이라, 즐길 틈을 찾기가 어렵다. 솔캠에서는 그런 시간들이 온전히 다 나에게로 돌아오니 여유가 많았다. 적당한 식사와, 적당한 음주, 조용한 음악과 불멍, 별 보기, 생각하기. 길지 않은 밤이었지만, 의미 깊은 시간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원래 미션은 다 완료하였으니, 이제 견인차를 끌고 집으로 올라오면 됐지만, 여기까지 온 시간과 돈이 아까워 설악산 등산을 해보기로 했다. 산도 싫어하고, 혼자 가는 산은 더 싫어하던 내가 40대가 되니 바뀌어 가나보다. 체력이 바닥이니 울산바위나 대청봉은 어려울 것 같고, 가깝고 짧은 코스로 찾아본 곳이 금강산 화암사 3.2km 코스였다. 설악산에는 워낙 유명한 산행 코스가 많아, 주류에는 끼지 못하는 코스이고, 너무 짧아서 서울에서 굳이 시간을 내어 오지는 않는다는 곳. 그렇지만 정상에 올라가면 기가 막힌 뷰가 있다는 곳이라, 이 날 내게 주어진 시간과 딱 맞아 보였다.


어질러 놓은 것이 없으니 철수도 간단하였다. 온 듯 안 온 듯 흔적도 남기지 않고 캠핑장 문을 닫고 나왔다. 캠핑장에서 화암산까지는 20분 정도의 거리. 태풍이 지나간 설악산은 날씨가 너무도 맑고 쾌청하여 운전이 힘들지 않았다. 중간에 델피노에서 산에서 먹을 샌드위치를 하나 사고, 화암사 주차장에 차를 댄 후 혼자 산행을 시작하였다. 평일이라 산행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출발 지점을 찾지 못하여 한참을 헤맸다. 화암사 한 바퀴를 돌고서야 코스 입구를 찾아냈다. 체력을 이미 소진해서 그런가, 출발 10분도 안돼서 심박수는 130을 넘기고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다. 내가 여기를 왜 왔을까, 휴일에 왜 고생을 사서 하는가, 수없이 본인의 선택을 후회하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갔다. 그렇게 30분이면 오른다는 길을 한 시간 걸려 올라갔다. 초반의 급경사를 지나고 나니 다소 완만해졌고,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출발 한 시간 경과 후 신선대에 도착했다. 먼 옛날 천상의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곳. 성인바위라고도 보이는 이곳은 놀랍게도 북한 금강산의 끝자락이라고도 한다. 산을 많이 와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의 소요 시간을 투자하고, 받기에는 과분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보통은 바람이 굉장하여 서있기도 힘들다고들 하였는데, 운이 좋게도 바람도 없고 하늘은 맑은 그런 날이었다. 체력이 소진된 탓에 아침에 준비해 온 샌드위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꺼내 먹으면서 그런 풍경을 감상하였다. 사람 마음은 정말 간사하다. 산행 초반에 힘들 때는 그렇게 원망을 많이 하더니, 막상 올라와서 휴식을 갖고, 이런 풍경을 눈에 담자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아침의 생각을 눌러버렸다. 심지어 혼자 산행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래서 40대가 되면 산을 찾나 보다.


점심을 먹고 기운을 좀 차린 뒤, 원래 목적이었던 울산바위를 찾아보았다. 신선대 뒤로 꽤 넓은 능선을 끼고 바위산이 이어지는데 맨 끝으로 가면 울산바위를 볼 수 있었다. 울산바위를 이렇게 가까이 본 적이 없는지라 그 풍경에 넋을 잃고 구경을 하고 있는데 나처럼 혼자 산행을 하는 청년이 이제 막 도착하여 대화를 조금 나누었다. 내가 말하기보다는, 그 청년이 주로 말을 했지만. 양구가 고향이고, 30분이면 올라오는 쉬운 코스라 좋아한다고, 인스타 핫플레이스라 주말에는 줄을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라고, 누가 봐도 외향성 성격인 그 청년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덕분에 꽤 근사한 사진도 하나 남겼다. 정면을 보고 찍으니, 요즘에는 살짝 뒤를 바라보고 찍는 것이라는 포즈 팁까지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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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진을 찍기 싫었던 이유는 너무 힘들기도 하였고, 등산 생각은 전혀 없이 내려온 터라 복장이 완전 40대 아저씨 그 자체였다. 띄엄띄엄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다 화사한 옷들을 입고 오는데 인스타 명소라서 그랬나 보다. 다음 혼자 산행을 하게 된다면 나도 체력을 기르고, 옷도 예쁘게 입고 올라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인생 사진도 몇 장 더 찍고, 좋은 풍경도 눈에 많이 담은 후, 하산을 하였다. 실제로 하산길은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재미있었던 것은 올라갈 때 만난 사람들은 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인사를 해주셔서 참 신기하다 했는데, 내려갈 때 만난 사람들, 그러니까 산을 올라가는 분들은 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서 내가 인사를 해줬다. 사람은 다 여유가 있어야 베풀 수 있는 것이라는 단순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 하산을 하고, 화암사 앞마당에 있는 찻집에서 시원한 오미자차 한잔 마시며 내 생애 첫 혼자 산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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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반으로 다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몇 개 없는 짐을 싸고, 가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올 것 같으니, 카라반 정리를 꼼꼼히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짧지만 강력했던 1박 2일의 혼캠핑, 혼등산.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긍정적으로 살기, 책 많이 읽기, 운동 많이 하기 등등의 올바른 생각들로 나 자신을 추슬렀다. 상황이 잘 맞아야 누릴 수 있는 호사이겠지만, 가끔씩은 해봄직한 캠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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