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20190408 22일 차

by 로사 권민희


오빠는 영은 어느 곳에서 휴식을 하고 있을까? 이번 주 일요일은 오빠의 기일이다. 정읍의 아빠, 군포의 엄마, 서울의 동생이었던 살아 있는 가족 세 명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추모할지 지난주부터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자리에서 권정민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사랑의 마음을 내는 한 주 만들면 좋겠다는데 뜻을 모았다. 슬픔과 아픔 그리움이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알아가는 시간들이 주어졌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14년 만에 기재사를 서초동 정토회관에서 지낼 예정이다. 내가 정성껏 나물과 전을 만들 예정이고 재비는 인도 둥게스와리의 수자타 아카데미 학교로 기부될 계획이다.

2005년 3월 꽃이 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문경에서 행자생활이 시작되었다. 새벽 4시쯤 일어나 열댓 명이 일인용 요와 이불을 개고 잠시 명상을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도량석 소리가 들려오면 주섬주섬 법복을 입고, 이불을 개고 방을 정돈한다. 새벽예불 몸을 움직이고, 고요한 동력을 지어낸다. 밝은 마음으로 각자의 소임을 맡은 공간으로 가서 일을 한다. 나의 첫 임무는 해우소 관리. 석축을 따라 내려가면 생태뒷간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왕겨와 섞인 배설물들을 정돈하고, 소변과 대변을 따로 나눠 배양을 할 수 있도록 큰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나중에 밭에 뿌릴 퇴비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주변을 물을 뿌리고 비와 수세미 수건을 활용해 깨끗하게 청소한다. 이후 공동 목욕탕, 공양간, 사무실 등 소임을 돌아가며 수련원 곳곳을 알아가고 친해진다. 새벽 소임을 마칠 무렵 목탁이 울린다.

각자의 장소에서 일을 마친 행자들이 의복을 정돈하고, 음식을 나누어 들고 이동하여 큰 법당으로 향한다. 30여 명이 둘러앉아 발우공양을 시작한다. 소심경을 외우는 일은 흥이 돋는다. 불교 의식의 리듬과 선율이 나는 좋더라. 밥 국 반찬 과일을 4개의 그릇에 담고 함께 속도를 맞추어 먹고, 설거지까지 한자리에서 마칠 수 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대중공사(공지사항)를 나누기도 하는데 가끔 웃음보가 터지면 멈추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공양 당번을 도와 전체용 그릇들을 뒷설거지하고 잠시 휴식 시간 후 아침 소임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당시 나는 주로 나무를 하거나 밭의 돌을 고르는 일 등을 했다. 신참 행자들을 아침 시간에 기도를 하거나 행사를 준비하기도 했다. 삼시 세끼 발우공양과 새벽, 아침, 오후 울력 후 저녁에는 학습의 시간이 펼쳐져 꽤 바쁜 일과를 보낸다.

한 달 남짓 그 생활에 익숙해갈 무렵, 저녁 연찬 시간에 한참을 웃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였다. "오빠가 죽었다."라고 말했다. 서로 침묵했다. 알았다고 이야기하고 대중 방으로 건너왔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주저앉았다. 눈물이 나오기도 했고 정신이 멍했다. 그런 나에게 법사님께서는 몇 가지를 묻고는 문경에서 대학로 서울대학교 병원까지 올라가는 팀을 꾸렸다. 부들부들 떨면서 옷을 갈아입는 내게 함께 방을 썼던 정광명 언니가 손에 오만 원을 쥐어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했다. 행자들 몇 명이 봉고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거의 자정이 되어 도착한 병원의 장례식장. 내 생애 첫 상주가 되었다.

한창 불교와 수행에 마음을 두고 행자로 입재했던 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오빠의 장례를 치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삼일장은 내내 천수경, 금강경 독송이 끊이지 않았으며 입관 때까지 목탁 소리가 맑게 울렸다. 49재 역시 문경에서 치러졌는데 한 주에 한 번 가족들이 문경에 와서 재를 지내고 무거운 마음을 내어놓고 가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 입재를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오빠의 삶의 마지막 순간이 나의 슬픔을 점철되어 있었을 터이니까 말이다. 세상을 위해 발을 내딛는 것은 가장 기초적으로 나를 위한 일이고, 내 주변을 위한 일임을 그때 배웠다.

내 인생의 첫 100일간의 행자 생활은 오빠의 말기암 시한부 판정 소식과 예상보다 일찍 가버린 오빠의 장례식, 그리고 49재로 기도를 깊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이 쇠약해져 회향을 했다. 물론 건강 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나에겐 속세를 버릴 수 없었던 집착이 더 컸다. 남자, 술, 춤, 일.... 세상의 인정. 그 마음은 꽁꽁 묶어둔 채 귀촌을 실현하겠다며 시골로 갔던 걸 생각하며 나의 억압력은 히틀러급이었다.

오빠의 기일 즈음에 한 덩어리로 떠오르는 기억들. 벚꽃이 만발하던 문경, 조팝나무를 꺾어 영단에 올리던 순간, 정읍의 여름. 4월은 그런 기억의 조각이 소환되어 감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만보 걷기도 하고,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연습을 하기 좋은 달로 변화를 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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