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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라코알라 Nov 30. 2022

뜻밖의 선물

둘째 딸아이의 손편지에 눈물을 쏟았습니다


큰 아이는 졸업을 했고, 작은 아이는 여전히 다니고 있는 중학교에서는 해마다 학부모들을 위한 강연을 열어주십니다. 강연을 주최하는 선생님들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또 강연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 좋아서 열심히 참여하고 있죠. 코로나 기간에도 비대면으로 강연을 열어주셔서 작년과 재작년에도 좋은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올해의 마지막 강연이 있어서 오전에 짬을 내어 학교를 찾았습니다. 강연장 입구에서 출석 사인을 하고, 정성스럽게 준비된 다과와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한 선생님께서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뒤에 있으니 가져가라고요. 속으로 '설마... 이 녀석 내 생일에도 편지 한 통 없이 건너뛰었는데...' 생각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리번두리번 아이 이름을 찾았습니다.


분홍색 편지봉투의 겉면에서 2-1, 림보(저는 앞에 '느'를 붙여 놓은 걸 아이는 끝에 '물'을 붙여서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별명을 이름으로 대신합니다)를 찾고 저는 이미 감동이었고, 마음은 꽃밭이었습니다. 아이에게 답장을 적어 느린 우체통에 넣으면 12월 23일, 아이에게 전달이 될 거라며 선생님께서 빈 카드 한 장을 조심스럽게 내미십니다. 유난히 저의 손편지를 좋아하는 작은 아이에게 이만한 이벤트가 또 있으랴 싶어 얼른 카드를 받아들었죠.


답장을 쓰려면 우선 아이의 편지를 꺼내 읽어보는 것이 순서일 거 같아 강연이 시작되기 전 봉투를 열었던 것이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답장을 적었습니다. 답장에 뭐라고 적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어 봅니다.

사랑하는 림보 엄마께 ♡

엄마 안녕? 나 림보야.

엄마께 편지를 써보라는 선생님의 제안 덕분에 엄마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네. 내가 엄마한테 쓰는 손편지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그치?
마음 같아서는 며칠 전이었던 엄마 생신 때 편지도 쓰고, 미역국도 만들고, 선물도 드리고 싶었는데 시간이 넉넉치 않더라고. 막상 엄마 생신이 지나가니까 마음에 많이 걸리더라. 내년 생신 때는 기깔나게 챙겨보려고 노력해 볼게...♡

엄마는 아는지 모르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 스스로 사춘기가 끝나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어.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ㅎㅎ 내가 사춘기 때를 생각하면 엄마한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지만 아직 마무리 과정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엄마가 두 딸들을 지금까지 잘 케어해줬기 때문에 언니랑 내가 사이도 좋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엄마도 엄마가 처음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우리를 잘 키웠는지 참... 나는 엄마의 근성과 노력이 가끔 존경스럽기도 해. 엄마가 나의 엄마여줘서 고마워 엄마.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는 우리가 엄마 아빠께 효도해 드릴 날들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슬슬 '엄마'라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인간 '박민혜'로 엄마의 인생을 살기를 딸 '림보'가 옆에서 열심히 응원할게. 엄마의 인생도 잠시 보류해 둔 채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워. 엄마의 풍족한 사랑을 나눠준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살아나가고 있는 거야. 모두 다 엄마 덕분이야. (물론 아빠도 ㅎㅎ)

이런 간단한 손편지도 써보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네. 앞으로 많이 편지 써볼게.
이 편지를 엄마가 언제 받을지는 모르지만 이 편지를 보고 감동받았으면 좋겠구먼...ㅎㅎ
나는 이만 수학 숙제를 하러 가볼겡... ㅠ ㅠ

나를 사랑으로 키워줘서, 늘 사랑을 나눠줘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들어주려고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랑해 엄마 ♡

-엄마의 둘째 딸 림보 올림-


중2 수준의 글이라 다소 어색한 곳도 있겠지만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봤어요. 옮겨 적는 사이에도 눈물, 콧물이 쉴 새 없네요. 제가 아이에게 쏟는 사랑과 정성은 콩나물 시루에 붓는 물처럼 아래로 흘러 다 빠져나가는 줄만 알았어요.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간섭과 부담으로 여기는 듯한 아이의 행동 때문에, 툭툭 내뱉는 아이의 말이 하도 독해서 부아가 치밀 때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제 상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을 아이가 알아주는 것 같아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사춘기 자녀와의 대화 어떻게 잘 할 수 있냐는 질문에 김현수 선생님은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화해하면 잘 하고 있는 거라고 하셨지요.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우즈 위니컷은 공격과 미움이라는 감정을 다루어보고, 숙달하는 것을 부모와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통제하는 부모가 승자가 아니라 참는 부모가 승자라고 했지요.


오늘 뜻밖의 편지를 받고 보니 제가 딸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딸아이가 저를 키우고 있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딸을 낳은 덕분에 엄마란 이름을 얻었고, 딸들을 키우며 인내를 배웠으며, 커가는 딸들을 지켜보며 딸아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 있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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