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떼주 강(Rio Tejo) 건너 그 곳 어딘가 - 고래군
리스본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江)이 하나 있다. 스페인에서 시작되는 이 강은 리스본을 지나치고 나면 곧바로 대서양 거대한 바다의 일부가 된다. 리스본 인근에 이르면 이 강은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광활한 규모로 강폭이 넓어진다. 바로 떼주 강Rio Tejo이다.
이 강에는 두 개의 커다란 다리가 놓여 있다. 예전부터 우리는 다리 근처를 지날 때마다 건너편을 궁금해 했다. 그리고 종종 이렇게 서로에게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시간 나면 저 다리 건너편에 한 번 가보자.”
하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뭐 하지?’에 대한 막연한 대답으로 오늘 강 건너편 도시를 하나 무작정 선택해서 가보기로 했다. 그곳이 바로 세투발Setúbal이다.
#2. 세투발은 어디? - 미니양
세투발까지 가는 관광객들이 없는지 관련 정보가 거의 전무했다. 여러 번의 검색 끝에 간신히 정보를 조금 얻을 수 있었는데, 그에 따르자면 세투발까지는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기차는 포르투갈 홈페이지에서 검색이 가능했는데, Sete Rios역에서 근교 열차를 타고 갈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하루에 출발하는 기차 편이 많지는 않았고, 기차요금 또한 그리 싸지는 않았다. (2등석 기준 9.70유로) 뭐 그래도 새로운 곳을 개척한다는(?) 기분으로 우리는 세투발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우리 동네 그라사 Graca에서 출발하여 버스를 타고 Sete Rios역으로 가는 길. 그런데 어라? 아무래도 기차 시간에 늦을 것 같다. 눈 앞에서 버스를 한 대 놓친 탓이 컸다. 어떻게 할까? 세투발을 포기할까 하다가 기차 대신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시외버스로 세투발까지 가는 교통편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아는 정보라곤 Praça de Espanha에서 탈 수 있다는 것 정도.
우리는 '내려서 물어보지, 뭐.' 하며 무작정 내렸다. 사실 뭐 '이도저도 안 되면 안 가면 되지.'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용기이기도 했다. 에스파냐 광장에서 내린 우리는 하얀 버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티켓 오피스를 찾았다. 그리고는 친절한 티켓 언니의 도움에 무사히 세투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드디어 세투발을 가는 구나! 게다가 4월 25일 다리까지 건널 수 있다니, 1석 2조였다.
#3. 세투발은 여기 - 고래군
우리를 내려놓은 시외버스를 뒤로 하고 터미널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넸다.
"오빠, 올 때는 4월 25일 다리를 건넜잖아요 우리."
"응, 그런데?"
"이따가 돌아갈 때는 오리엔떼로 가는 버스 탈까? 그러면 버스가 다른 다리 건너가는 거 같아."
돌아갈 때는 리스본 오리엔테Oriente로 가자고? 오리엔떼면 '동쪽'이라는 뜻인 것 같고. 예전에 왔을 때 마드리드에서 리스본 올 때 도착했던 그 웅장한 터미널 있는 동네 아닌가?
"그 왜 있잖아. 바스코 다 가마 다리. 기억 안 나요?"
"아! 그 길다는 다리?"
어쩌다 보니 이곳 세투발Setúbal에 도착하자마자 떠나기 위한 계획부터 세운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니까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일 테다. 그러고 보면 이번 세투발 여행은 여행 속 여행인 셈인가? 그 왜 극중극이나 액자소설처럼 말이다.
‘세상이라는 무대Theatrum Mundi’라는 연극 용어가 있다. ‘극중극’이라는 것이 무대 위 배우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다른 연극을 바라보는 것을, 무대 바깥의 관객이 바라보는 구조라고 한다면, 어쩌면 독자 또는 관객이 살아가는 현실 역시 일종의 무대이며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관념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마찬가지로 생각해본다면 리스본 여행 속 세투발 여행이라고 본다면, 결국 나의 삶 자체도 여행이라는 유추가 가능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세계’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가 ‘Mundo’였나?
세투발의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제일 먼저 든 느낌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멈춤’이었다. 마치 시간마저도 간신히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곳 세투발의 첫인상은 인적이 적고 별다른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길을 걷는 도중에 마주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연세가 많이 든 어르신들이다. 아마 내가 어쩌다 보니 길을 정적인 느낌이 들게 선택했거나, 또는 그저 우연히 그렇게 행인들을 만난 것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세투발의 첫인상은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은 멈춰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나의 이러한 오해가 풀린 것은 바닷가에 도착한 후였다. 건너편으로는 아스라이 트로이아 반도Tróia Peninsula가 보이는 이 해변에는 걷거나, 또는 잠시 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연령층은 여전히 꽤나 높았지만 말이다.
바닷가를 따라 우리도 서쪽으로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곳의 시간은 느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떠내려가고 있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리스본에서 서울의 시간을 너무 성급하다고 비판하던 나의 시간을 다시 성급하다고 비판하듯 말이다.
그러고 보니 세투발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비토리오 세투발이던가?
#4. 세투발의 꾸이 - 미니양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를 안 했구나. 리스본이 어쨌든 바다가 아닌 강을 끼고 있는 도시라고 한다면, 여기 세투발Setúbal은 분명하게 항구 도시이다. 우리가 터미널에서부터 골목길들을 탐험하고, 다음으로 바닷가를 향할 때 나를 급격하게 엄습한 것은 바로 허기였다. 마치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가 세상 전체를 멈추고 "배가 고프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처럼 말이다.
바닷가에 거의 다다를 때쯤 우리 앞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리브라멘투 시장Mercado do Livramento에 도착하기 직전에 나타나 생선 굽는 냄새를 한가득 안겨준 식당, '발루아르테 두 사두Baluarte Do Sado'였다. 생선 구이 냄새에 이끌리듯 들어간 곳에는 갓잡은 싱싱한 생선들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식당 주인 아저씨는 오늘 아침에 세투발에서 잡은 생선이라고 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오징어와 갈치를 닮은 크고 검은 물고기를 선택했다. 오징어는 먹물을 같이 넣어줄까 물어봐서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맥주 한 잔을 홀짝이며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식당 안은 손님들로 가득찼다. 나도 몰랐던 세투발 맛집인건가 싶은 생각을 하며, 음식을 기다렸다. 이윽고 주문한 요리가 나오고 생각보다 까만 먹물 오징어와 생각보다 컸던 까만 갈치(?) 한 덩이를 보고 놀랐다.
난 별 거부감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고래군은 까만 먹물을 뒤집어 쓴 갑오징어가 조금 낯설었던 모양이다. 조금 주저하더니, 곧잘 입에 넣었다. (물론 까만 갈치 위주로.) 우리가 포르투갈에 와서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도 비쌌지만, 그래도 낯선 곳에서의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우리는 다시 바닷가 쪽으로 산책을 나섰다. 식사하는 사이 날씨가 조금 흐려졌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게 만족스러웠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