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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 Apr 04. 2021

성하께는 다 계획이 있었나

Robert Harris <Conclave>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마음 상태가 된다. "네 <다빈치 코드>를 읽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네요." 즉 읽기 시작한 이상 끝까지 읽기는 했지만 다 읽은 뒤 어쩐지 시간이 아깝다거나, 크게 '낚인' 듯한 찝찝한 뒷맛에 괴로워한다(쓴웃음).
- 이다혜 <아무튼, 스릴러> 베이비, 세 권만 참고 읽어봐
(움베르토 에코 인용은 <작가란 무엇인가> 인터뷰 중)
<다빈치 코드> 작가 댄 브라운은 <푸코의 진자>에 나왔을 것 같은 인물이죠. 내가 그를 만들어냈어요. 그는 내 소설 등장인물처럼 이야기합니다 - 장미 십자회, 메이슨, 그리고 예수회, 거기서 파생된 음모론. 성당기사단, 헤르메스 비교. 그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는 주장. 나는 댄 브라운이 실존인물은 맞나 의심스러워요.
- interview with the Paris Review (2008)
- Guardian
- 엉성한 번역은 내가.

이야 에코 교수님 이렇게까지 말해도 돼요...? 괜찮나? 이 파리 리뷰 인터뷰 읽고 첫 반응은 저거고 그 다음엔 좀 움찔. 나 읽으면서 꽤 즐겼는 걸. 추격전이 계속 연결되는 영화 보는 기분? 이렇게까지 오락적인 측면으로 밀어서 써도 되는구나, 싶던. 로버트 랭던 시리즈는 그 뒤에 한 권 더 읽었는데, 아마  <천사와 악마> 였나. 기억이 제대로 안 난다는 게 이 방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걸까.


에코 교수님은 아마 음모론을 즐기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잠깐만요 이건 좀, 하고 <다빈치 코드>에서 걸고넘어지고 싶었던 부분은 따로 있다 (성당기사단이니 예수의 혈통이니 프랑스 왕가니 하는 거 말고):

(1) 그 정도 사건으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주며 키워준 할아버지랑 연 끊니...? 진짜 그게 다야? 다른 거 없어? 난 무슨 연쇄살인 정도는 저지른 줄 알았지. 연구비를 어마어마하게 횡령했다던가. 예술품을 빼돌렸던가. 그럼 연 끊는 게 아니라 경찰서로 가야 하겠지만.

(2) 피보나치... 그것도 정직하게 시작 부분. 저기요...? 너드를 얕보면 안 된다고요? 그거 사진 인터넷에 떴으면 3분 안에 누가 덧글로 피보나치 달았어. 그러고 보니 <다빈치 코드>는 언제 출간되었더라. 파리 리뷰 인터뷰가 2008년이니 그 이전이지만, 요즘이면 피보나치수열 앞부분은 구글에 검색하면 피보나치라고 답을 줍니다. 차라리 소피 생일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던가 random Fibonacci sequence정도는 쓰는 정성을 보여주세요.


어쨌거나 덕분에(?), 제목은 <Conclave>, 작가 이름은 Robert Harris (그때는 이 작가분 잘 몰랐다. 남의 이름에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너무 스릴러물 등장인물 이름이지 않나), 표지는 붉은 계열에 바티칸 하늘 배경으로 헬리콥터가 날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댕- 하며 "<다빈치 코드>를 읽어 버렸어!"가 울린 거다. 덕분에(2) <아무튼, 스릴러>에서 저 구절 보고 <Conclave>가 다시 생각났지만.


비행기 타기 직전에는 항상 뭔가 읽을 걸 아이패드에 다운로드하는데 (기존에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하겠지만 늘 새로운 읽을거리를 찾게 되잖아요) 아마존 알고리즘이 '너는 이것을 읽으라' 며 내놓은 책이다. 샘플을 읽는데 다시 댕- 당첨, 취향이군요 하고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로멜리 추기경이 교황께서 선종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새벽에 황망하게 뛰쳐나가는 장면. 슬픔과 교황에 대한 원망(마지막에 나눈 대화가 은퇴 요청, 거절, 그리고 "너는 매니저다" 라는 로멜리 입장에서의 비난이 섞여서 서먹하게 끝났음), 그 배경의 바티칸 풍경.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기도합시다 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 까지. 이런 세세한 묘사가.


나는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 탐험대 여정을 꼭꼭 씹을 기세로 읽고, <장미의 이름>에서 겨울 산길을 오르며 윌리엄과 아드소가 대화하는 첫 장면, 윌리엄이 수도원 돌아다니면서 이곳저곳 살펴보는 장면 같은 것을 다시 읽는 사람입니다. 자, 너는 한 동안 이런 세상을 들여다보는 거야, 하고 디테일을 묘사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바티칸은 실제 공간이지만, 나에게는 미지의 공간이고, 거기에서 생활하는 추기경의 관점은 완전히 생소하니까.


<Conclave> 읽고 꽤 지나서 <Two Popes>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는데 (동네 영화관 - Watershed - 최고), 투표 장면이라던가 에서 뭔가 기시감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나 저거 '읽었어'. 소설 <Conclave>의 묘사가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https://brunch.co.kr/@minjbook/11


<Two Popes>는 현 교황 프란치스코와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베네딕토 16세(Anthony Hopkins) 교황이 너무 카리스마 넘치고 인간적이라서 상대적으로 프란치스코(Jonathan Pryce) 교황이 묻히는 감이 있지만 - 성스러운 교황을 묘사하고 싶었던 건가 싶지만 - 멋진 영화다. 시스티나 성당을 둘이서 차지하고 대화를 하는 부분이 좀 부러웠음.


<Conclave> 전개는 시간/사건 흐름을 따른다. 교황께서 갑작스럽게 선종하시고 (소설이 스릴러로 분류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교황이 살해당했고 로멜리 추기경이 탐정 인가 했다. 탐정 역할을 하긴 하지만) 추기경단 단장인 로멜리 추기경은 콘클라베를 이끈다. 하지만 투표가 계속되면서 가톨릭 교회의 문제점 - 보수적인 추기경들, 섹스 스캔들, 현대사회에서는(중세-르네상스에서는 다 그렇지 하고 별 문제 안되지 않았을까) 문제가 되는 돈 관련 스캔들... - 이 삐져나오고 거기에 더해서 콘클라베 기간이 늘어짐에 따라 외부의 테러까지. 새로운 교황은 누가 될 것인가...!


사실 애거서 크리스티 독자 시점 소거법(...)으로 누가 교황이 되나는 예측할 수 있다. 복선이나 근거도 꽤 깔끔하고 공정하게 주어지고. 그런 것 보다 118명이나 되는 추기경들이 등장해서 와글거리며 세기의 이벤트를 진행하고 거기서 보이는 캐릭터들이 재미있는 거지만.


예를 들어 콘클라베 시작되기 전에 추기경들 도착 장면 같은 것 (2장 Casa Santa Marta). 읽는 나도 즐거웠지만 작가님도 이거 쓰면서 꽤 즐기지 않았을까. 추기경 이름/성향/국적/특이사항 같은 게 나열되어 있는데 묘하게 매치가 되면서 웃긴다:

Brazilian Cardinal Sá, Archibishop of São Salvador de Bahia (aged 60, liberation theologian, a possible Pope, but not this time)
... ...
the Belgian, Cardinal Vandroogenbroek (aged 68, ex-Professor of Theology at Louvain University, advocate of Curial appointements for women, no-hoper)

... 네? no-hoper? 구글 검색했더니 one that has no chance of success 라는데요...?

어쨌든 이런 식. 거기에 (추기경단의 단장으로서 추기경들을 맞이하고 있는) 로멜리 추기경 이 속으로 덧붙이는 것들은 이렇다 -

브라질 추기경들과 칠레 추기경들의 바디 랭귀지를 관찰하고 있자면 - 저들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다 - 단합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미국인들이란, 로멜리는 생각했다, 꼭 저렇게 몰려다니지.
콘클라베에서 이기려면 아데예미는 아프리카와 제3세계뿐만 아니라 그 밖에서도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그건 어려울 것이다. 그가 늘 하던 것처럼 글로벌 캐피털리즘과 동성애를 비난하면 아프리카의 지지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아메리카와 유럽의 지지는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추기경들 - 도합 하면 56명 - 은 콘클라베의 거의 반을 차지한다.
(프랑스계 캐나다 추기경 트랑블레(Tremblay), 다음 교황 유력 후보를 맞이하며) 트랑블레가 이기면 그다음 날 로마를 떠나야지.

(모든 엉성한 번역은 나)


그리고 유럽 추기경들.... 어... 나치에 어머니를 잃은 추기경과 홀로코스트를 부정한다는 의혹을 사는 추기경이 같이 등장하는데요. 괜찮나...?


그리고 마지막에 의문의 바그다드 추기경(필리핀인)이 도착하는데...!


읽으면서 <장미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생각났다. 수도원에 교황 쪽 인사들과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도착하는 장면이라던가, 얘네들이 모여서 회의라는 이름의 카오스를 연출하는 장면이라던가, <Conclave>에서는 그 정도의 카오스는 없지만 이쪽도...


Wallander 시리즈에서 Wallander의 애처로움이 매력포인트 라면

https://brunch.co.kr/@minjbook/1

<Conclave>에는 로멜리 추기경의 번아웃이 있다. 이 분 아무리 봐도 심각한 번아웃이야. 신을 영접하지 못하게 된 지 꽤 되었고 (중간에 드디어 성령을 다시 느끼게 되어 기뻐하는 모습이 나온다. 나까지 좀 감동할 정도로), 기도를 관성적으로 하게 되어서 괴로워하고, 게다가 최근까지 암 치료받았고... 그래서 전 교황에게 은퇴를 요청했지만 성하가 좀 불필요할 정도로 냉정하게 거절한다

Some are chosen to be shephards, and others are needed to manage the farm. Yours is not a pastoral role. You are not a shepherd. You are a manger. Do you think it's easy for me? I need you here. Don't worry. God will return to you. He always does.
- <Conclave> 1. Sede vacante

... 그렇게 심한 말 아닌데...? 어쨌든 저 manager라는 말에 로멜리는 꽤 상처 받는다.... 성하 왜 그러셨어요. 그래도 죽기 전에 좀 다시 생각은 해 보셨으려나. 그랬어야 하는데. 번아웃한 중간관리자 괴롭히면 안 됩니다. 교황은 은퇴할 수도 없고(물론 이제 예외가 생겼지만), 본인의 건강도 안 좋고 주변 모든 것-특히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던 때이니, 로멜리가 안되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본인(교황) 큰 그림 생각하면 은퇴 못 시키고.... 뭐 그래서 좋게 말이 안 나가고 manager라고 한 것 같은데. 그런데 매니저가 어때서요 예하. 매니저 소리 좀 들었다고 세상 끝난 것처럼 그러니까 좀...? 매니저는 소중합니다. 당신 없이 콘클라베 제대로 구르기나 했겠어요. 교황께서 사람 제대로 봤지. 못 놓을 만하던데.


어쨌든 로멜리 추기경의 번아웃. 그리고 그 아래의 진정한 (유능한) 중간관리자가 또 있으니. 오말리(O'Mally) 몬시뇰. 보이지 않는 손(?). 로멜리 추기경이 탐정 역할이라면 추기경 부단장인 오말리 몬시뇰은 탐정 보좌. 온갖 잡무(콘클라베를 이끄는 잡다한 일들. 아침에 시스티나 대성당으로 추기경들 모셔가는 것부터,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새로운 추기경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해주고 관련 정보를 파악해서 로멜리 추기경에 넘기는 일까지)를 해결하고 정보를 모아 오는 능력자.


우리는 신을 믿었던가 아니면 교회를 믿었던가

Was it really possible that he had spend the past thirty years worshipping the Church rather than God?
 - <Conclave> 13. The Inner Sanctum

깨알 같은 귀여운(?) 포인트

- 벨리니 추기경이랑 교황이 매일 저녁 체스를 뒀다는 거. 대부분 교황이 이겼음. 하지만 포인트는 이 체스 셋이 막 번쩍번쩍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플라스틱 여행용이라는 거.

- 추기경/몬시뇰들이 서로 "자기 전 기도할 때 나를 기억해줘" 라고 부탁하는 거.

- 로멜리 추기경이 선종하신 교황을 마지막으로 살필 때 치약 묻은 거, 페퍼민트향이랑 샴푸의 꽃 향기를 맡는데 나는 거기서 <Whose body?>(DLS)가 생각.... 죄송합니다.

- 추기경들끼리는 너 지금 졸고 있다니 같은 쪽지도 성경구절 인용을 합니다. 48시간 동안 6시간은 잤나 싶은 로멜리 추기경이 투표 도중 졸고 있다가 깨니 벨리니 추기경이 쪽지로

And behold there arose a great storm on the sea, so that the boat was being swamped by the waves; but he was asleep, Matthew 8:24

같은 걸 보내고 거기에 로멜리 추기경 답

I lay down and slept; I woke again, for the Lord sustained me. Psalm 3.

- 어째서인지 테데스코(Tedesco) 추기경만 나오면 빼뽀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의 공산당원. 조반니노 과레스키)가 생각난다. 생김새 묘사가 비슷한가.


The Guardian : a triumphant Vatican showdown

<Conclave>, 예를 들자면 헨리 제임스의 책들이 아주 쉽게 내려놓을  있는 (putdownable) 정확히 같은 의미로 내려놓을  없는 (unputdownable)이다. 다시 말해 내려놓을  있다/없다가 이야기의 질적인 면을 측정해 주지 않는다는 면에서.
- The Guardian : a triumphant Vatican showdown  
- 엉성한 번역 -  

영국인들이란(...) 뭐랄까, 돌려 까는 걸까 돌려 칭찬하는 걸까 고민 좀 되는 부분이 좀 있는데 어쨌든 재미있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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