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지울 Mar 11. 2021

눈감고 걷기란

 눈을 떠서 느끼는 새벽의 기운이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몸이 아파오는 신호 같았다. 무거운 머리에 으스스한 기운에 두꺼운 스웨터를 찾아서 주섬주섬 입었다. 그렇게 몸을 감싸도 무거운 머리를 가볍게는 할 수 없었다. 오늘은 왠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일기장에 이런저런 생각들과 할 일들을 적다가 무언가에 집중하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긴 아까운 오늘 하루. 나의 뇌는 슬로모션 모드였고, 내 눈의 필터는 흑백이었다.


 오랫동안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던 친구에게 예쁜 딸이 찾아온 지 다섯 달이 지났다는 소식을 떠올리며 선물을 골라서 보내기로 했다. 참 편한 세상! 친구의 기쁨 서린 답장이 바로 도착했다. 그리고 엄마의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나를 걱정한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나가서 분위기 좋은 곳에서 차 한잔 해. 그것부터 해. 그래도 괜찮아!"


 언제나 엄마는 나의 가장 현명한 카운슬러이다. 엄마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언제나 나를 향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설탕 한 스푼 하고 반을 더 넣은 홍차를 마시는 기분이다.

 마쳐야 할 일을 책상에 두고 앉아 집중을 해보려는데 친구의 전화가 걸려왔다. 최근에 약간의 반항기 서린 행동을 하는 아들 덕에 골머리나 썩는 모양이다. 해줄 말은 없어도 들어줄 귀는 있기에 한참을 듣고 소소한 농담으로 웃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창밖엔 벌써 햇살이 가득하다.


 엄마 말처럼 오늘은 집안에서 탈출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책 5권을 꾸역꾸역 가방에 넣고 노트북에 일기장까지 챙겨 들고 카페로 향했다. 카페로 와서 이 책 저책을 뒤졌다. 오늘 꼭 찾아야 할 구절이 있었다. 주위에 어려운 책들을 펴놓고 무거운 표정으로 공부하는 청년들이 나를 보면 '참 여유로운 사람이네!'라고 느끼지 않을까?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이내 나는 책들을 가방에 구겨 넣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또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햇살이 참 좋다. 나가서 꼭 걸어!" 작은 언니의 목소리였다.


'그래! 걷자.'





 책을 차 안에 던져두고 스웨터 차림으로 나는 바삐 강가로 나갔다. 이상하다. 햇살 때문일까? 나의 흑백 필터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 오늘 처음으로 터져 나오는 나의 진심! 줄임표 안에 담긴 많은 감정과 생각들. 걷다 보니 자꾸만 눈이 감고 싶어 졌다. 아무도 없을 때를 틈타 슬며시 눈을 감아보았다.


 따스한 봄의 기운에 솜사탕 깃털처럼 부드러운 바람의 결.  아슬아슬 눈을 뜨면 어느새 길이 아닌 곳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삐뚤빼뚤, 누군가가 본다면 나는 이상하게 걷고 있겠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세상의 길에서는 한참 어긋나 있었다.







 나는 그래도 자꾸만 눈을 감고만 싶어 졌다.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오기도 생겼다. 한참을 눈을 감은 채 걸었다. 가끔 발이 진흙으로 빠지면 눈을 뜨고 길 위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느리고도 느리게, 아무튼 나아가고 있었다.

 감은 눈으로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어둠 속에서 서서히 요즘 꽤 아팠던 마음이 그 상처를 드러냈다. 나는 그 상처를 모른 체하고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 내 마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오늘은 너를 기필코 보듬어야 했다.







 우리는 눈을 뜨고 똑바르게 살아가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지만, 사실 삶이란 참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단 한 가지라도 우리 예상대로 맞아떨어진 적이 있었나?


 결혼 전, 남편과 연애를 할 때였다. 처음으로 남편이 보여준 그의 식구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순박하고 정 많은 그의 고모였다. 고모의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과일을 한 아름 내놓고 까주시던 주름진 손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오늘처럼 햇살 좋은 날이었던가.

 얼마 전 그 고모가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밭을 태우다가 몸에 불이 붙으셨단다. 나는 자꾸만 그녀의 눈빛이 생각이 났다. 연약한 몸으로 그 뜨거운 불을 감당하지 못했으리라. 하필 그녀 일생의 모든 것이었던 삶의 터전에서 그렇게 모질게 그녀는 사라져야 했을까? 그렇게 피의 아수라장이 된 밭 위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해가 뜨고 달이 지고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토록 자연은 무섭도록 무심한가.


 우리는 삶을 각자가 계획한 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눈을 감아보면 사실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정 반대이다. 우리는 자연의 계획대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이 광활한 우주에 지구라는 행성에서 그것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나로서 태어나기를 선택한 적도 의도한 적도 없다.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시도들과 실패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도 그렇다. 햇살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듯,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듯, 우리는 생겨나는 데로 불어오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자꾸만 눈을 감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라는 필터를 벗겨내고 이 우주의 속삭임에 기를 기울여야 한다.


 한 노부부가 바삐 걸어간다. 그들은 꽤 바삐 걸어가지만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다. 그러나 눈을 감고 걸어가는 나를 제치고 갈 정도이긴 하다.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에 나는 눈을 뜨고 아무렇지 않은 듯 똑바로 걸어갔다. 요 며칠 괴로웠던 마음이 조금은 해소되었을까? 무겁던 머리도, 으스스한 몸의 기운도 많이 사라진 듯했다. 아마도 오늘의 산책이 이 동네에서의 마지막 산책이 아닐까. 참 그리울 것이다.

 

 이사를 앞두고서 닥쳐온 많은 일로 마음고생 꽤나 했던 나를 오늘 이 길이 부른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연은 없는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유난히 무거운 몸, 그리고 오늘 따라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전화로 나는 이 길로 불리어나왔다. 길 위에서 햇살, 강, 길, 바람, 갈대, 봄의 친구들과 작별했다. 아마 이 길위에서 눈을 감고 걷는 일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리라. 눈을 감아야 들리는 음성에 귀 기울이자 작은 전율이 흘렀다.


눈을 감고 걸어보라! 내 마음이 흘러가는 길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신비한 목소리들이 들려주는 비밀도 엿듣게 되리라.


노부부, 친구들,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이 길 위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속에 섞여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아픈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전 13화 입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