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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한국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어떻게 확장되었을까?

한국 기독교세계관 리더 출간기념 세미나에 다녀와서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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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을 공부한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이해가 전혀되지 않아서 철학아카데미를 다녔고, 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를 다녔다. 아직도 김동춘 교수님과 매주 독일신학을 배우고 있다. 최근 IVF에서 한국기독교 세계관 포럼을 열었다. 어쩌면 한국기독교 세계관의 초석을 놓은 송인규 교수님이 오셔서 발제를 해주셨고, 이재근 박사님께서 한국기독교세계관의 역사를 개관해주셨다. 그리고 전성민 교수님이 새로낸 책 '한국기독교세계관'에 대한 발제를 해주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매우 임팩트있고 생각할 꺼리가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모든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포럼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내용들 중심으로 한번 정리를 해보았다. 특히 송인규 교수님의 강연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https://brunch.co.kr/@minnation/1166


1. 세계관 인식의 3가지 수준 feat. 송인규


기독교 세계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하나님의 세계'인 자연에 대해서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볼 수 있다. 특히 '이론적' 혹은 '개념적'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세계관'이라는 것이 인간의 내면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학습되는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칸트가 보기에 '오성'의 개념은 이미 인간이 학습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는 '이해'의 기능이었다. 물론 들뢰즈와 같은 물질로부터 발생하는 인간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학습에 의한 것이여서 나중에는 이데올로기로 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세계관에 대한 신학자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세계관에 대해서 다양한 접근이 있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3가지의 관점이 있다. 첫번째는 전이론적 수준이고, 두번째는 이론적 수준이면서 서술적 차원이고, 세번째는 이론적 수준이면서 처방적 성격의 수준이다.


전이론적 수준 pre-theoretical level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형성되어 있다고 보는 수준이다.

인간은 태어나 어떤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신념들을 수용하게 된다고 보면서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환경의 힘을 강조한다.

많은 경우 자신이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의 내용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이론적 수준 theoretical level + 서술적 descriptive 차원

어떤 대상이 견지하고 있는 세계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묘사 혹은 서술하는 것임.

보통 문화 인류학자들이 취하는 방식으로서 관찰과 분석의 작업이 중요한 관건이 됨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발견한 것에 기초해 세계관 목록의 작성이 가능].

사람들이 견지한 세계관의 내용은 어떤 경우 온전히 일관되지도 않고 체계적이지도 않음.

세계관의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그런 세계관을 견지하게 되었는지 추적을 해 볼 수 있음.


이론적 수준 규범적 normative + 처방적 prescriptive 차원

개인이나 공동체가 지향하는 어떤 이상(ideal)의 견지에서 이론적이고 서술적인 내용을 평가하는 차원이다.

동시에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해 그들이 견지해야 할 세계관의 내용을 표준적으로 제시하고 내면화하도록 종용한다.

따라서 이 수준에서는 당위적 성격의 강조가 뚜렷해진다. 이는 칸트의 실천이성의 차원이면서 당위의 수준이다. “~이어야 한다”라는 부분이다. 이는 세계관의 내용이 하나의 규범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보통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하면, 바로 이런 수준의 처방적이고 규범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에 의해 그 골격이 구성되고 구체적 내용이 채워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 가지의 차원에서 보면 믿음의 과정에서 세계관의 변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물질관, 가치관, 사회관, 국가간이기 때문에 다소 분석적이고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서술적인 차원이 많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면 그 다음부터 기독교 세계관은 분석을 넘어서 행동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사회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화목의 장이 되어야 하며, 가정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방식의 주장말이다. 그래서 기독교세계관은 일단 접하게 되면 자신의 자아에 흡수되고 곧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유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송인규 교수님의 발표자료 중 발췌


2. 세계의 본질에 관한 두 가지 이론 feat. 송인규


송인규 교수는 세계관의 본질에 대해서 2가지의 이론을 주장한다. 세계관의 본질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식론'으로 보는 일종의 'b'이론이다. 여기서 b는 belief의 약자이며 우리나라말로 믿음 정도로 치환되지 않은 깊은 인식론적 차원을 말한다. 인식론은 무엇을 존재로 보고, 보고 있는 상황에서 인식되는 것과 인식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차원이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던지 '지식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은 보통 '세계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약간은 결이 다르게 H이론이 있다. 이것은 세계관은 단지 인식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마음'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지향을 말한다. 송인규 교수가 1980년대 한국사회에 세계관론을 처음으로 가져오면서 꺼낸 2가지의 화두는 지금도 계속 세계관에 대한 접근에 큰 흐름이다.


세계관의 본질을 belief로 보는 B 이론

초기 제임스 사이어의 입장: “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잠재의식적[번역 수정]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혹은 가정들)이다” A world view is a set of

presuppositions (or assumptions ) which we hold (consciously or subconsciously) about the basic makeup of our world

알버트 월터스의 입장 :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 the comprehensive framework of one’s basic beliefs about things

B 이론에 의하면, 세계관은 일련의 belief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인지적 내용의 파악이 핵심적 요건이라고 할 수 잇다.


세계관의 본질을 전인격적인 마음(heart)의 지향 자세로 보는 이론_H이론

후기 제임스 사이어의 입장 :“세계관이란 확약하는 일(commitment), 혹은 마음의 근본적 지향 자세로서 이야기로나 일련의 전제들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전제들(presuppositions)은 참일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만 참일 수도 있고 전혀 허위일 수도 있는 가정들(assumptions)인데, 실재의 기본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나, 일관적으로나 비일관적으로나 견지하는 바이고, 또 우리가 살고 기동하며 존재하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A worldview is a commitment , a fundamental orientation of the heart , that can be expressed as a story or in a set of presuppositions (assumptions which maybe true, partially true or entirely false) which we hold (consciously or subconsciously, consistently or inconsistently) about the basic consitution of reality, and that provides the foundation on which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선교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 1932-2007)의 입장: “실재의 성격에 대하여 일군(一群)의 사람들이 구성하는 인지적·정감적·평가적 차원의 근본 가정과 틀로서, 자신의 삶을 질서정연히 정립하는 데 사용한다” the foundational cognitive, affective, and evaluative assumptions and frameworks a group of people makes about the nature of reality which they use to order their lives.

정리: H 이론의 요체인즉, 세계관이 belief를 포함하지만 (혹은 belief로 표현되지만) 그 본질은 때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전인격적 반응과 삶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임.


이렇게 보면 세계관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부터 '세상'에 대해서 가지는 '세계의 상'이면서 이것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실천한다고 볼 수 있다. 성장하고 자라면서 세계관 학교가 계속해서 세계관을 바꾸어 주지만 말이다. 가족이라는 세계에서 유치원과 학교로, 그리고 대중문화의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확장되면서 사회에 나오면 자연스럽게 시장과 국가의 세계로 확장된다. 세계관이 만들어지고 나면 바뀌지 않는 순간이 대략 13세라고 한다. 그 이후에는 세계관이 하나의 지향이 되어서 잘 바뀌지 않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롤모델'이 바뀌거나 '롤모델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세계관이 바뀐다고 한다. 그러니 인식론의 차원이든 마음의 자세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계에 대한 일종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들은 말 중에서 '아마추어는 힘들 때까지 달리고, 프로는 힘든 때부터 달린다'라는 문장도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세계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리기라는 경험으로 바뀐 사례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 feat. 송인규

"세속"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 재고 : 송인규 교수님은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세속(世俗)**을 부정적이고 피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온 경향을 비판한다. 많은 기독교인이 세상을 "죄 많은 곳"으로만 규정하고,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거룩함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오히려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고,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긍정적 이해 : 그는 세상이 비록 죄로 인해 타락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세계로서 그 선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죄 많은 이 세상"이 단순히 죄로만 가득 찬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공간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으로서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적 적용 강조 : 송인규 교수님은 기독교 세계관이 단순히 이론적인 이해에 그쳐서는 안 되며,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실천적으로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세상 속 직업, 문화, 정치,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와 원리를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극복 : 결론적으로, 이 책은 기독교인들이 성속(聖俗) 이분법,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통합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촉구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여전히 돌보시는 곳이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3. 초기 한국 교회에 전해진 기독교 세계관의 역사


1985년 제임스사이어의 '한국기독교와 현대사상'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1980년대의 교회부흥의 시기가 있었다. 봄과 가을에는 항상 부흥회가 있었고, 기도원과 금식기도의 열풍, 나무뿌리를 뽑아 버리는 산기도와 성령세례의 다양한 모습들이 공존했다. 이 시대에는 부흥사들의 힘이 막강했으며 기존의 담임목사보다 오히려 부흥회를 진행하는 부흥사들이 그룹을 이루어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교계에서는 이러한 양적팽창에 힘입어서 메가처치라고 하는 순복음교회, 영락교회, 광림교회, 소망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들이 등장했다. 교단별 교회배가 운동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하는 방식의 크리스텐돔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4년 빌리그레이엄의 Explo74라던지 1980년의 민족복음화대성회는 한국이 명실상부 '선교한국'으로 거듭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0년대 교회의 성장과 다르게 한국 사회는 우울하고 어두운 박정희 유신체제를 지나서 전두환의 광주학살을 시작으로 잔인한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불의가 판을 치고 독재가 정점을 달하던 시가에 기독교 진보쪽의 NCC와 가톨릭 사제단은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독재에 항거했다. 치열하게 항거하는 모습이 1987년에 폭발하여 '향린교회'와 같은 시대의 부름에 답했다라고 할 수 있는 교회들이 나온다. 그러나 대형화되면서 확대되는 보수기독교와 대형교회들은 정치적 상황에 미온적이거나 회피했고, 심지어 지지하기도 했다. 그 입장은 요즘도 비슷한데 반공이라는 명목 하에 군사정부를 옹호하기도 한 것이다. 그 때 시작된 '조찬기도회'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 부분은 다른 곳에서 다루겠지만 정교분리의 원칙이라던지 기독교사회참여와 정의의 문제라던지 풀어야할 숙제들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영혼을 구원하고 전도하는 일에 목숨을 걸면서도 정작 그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반공으로 몰고 저주하던지, 아니면 격렬한 시위와 사회적 대립에 대해서 도피적인 분위기로 더욱 교회일에 몰두했다. 그런 의미에서 산기도나 기도원 문화는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여기서 핑계라고 몰아버리기에는 너무 편협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영혼구원은 곧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응답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결국 다소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불의와 압제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되었다. 물론 이당시 1974년의 로잔운동의 영향 그리고 이제 막 소개된 프란시스쉐퍼의 글들, 칼빈주의 혹은 신칼빈주의 운동이 있었기는 하지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 때 '돌파구'의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제 초기 기독교세계관을 이끌었던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와 현대사상' 영어로는 'The Universe Next Door : A basic worldview Catalogue'가 전해졌다. 1980년 이전에는 한국교회나 젊은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 때 당시 유명한 강사나 교수, 목사들에 의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전해지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1985년 제임스 사이어의 책이 발간되기 전까지 IVF사무실에서 8명 정도의 청년들이 모여서 영어로된 책을 스터디한다. 사이어의 책이 1976년에 나왔고 이들의 스터디가 1982년에 시작되었으니깐 전해지기 까지 5년정도가 지났고 다시 이것이 번역판으로 나오기까지 3년이 걸린 것이다.


스스로 스터디를 히작하기에는 너무 초기여서 당시 하버드 법대 출신 하버드 전임연구원이었던 '윌리엄 쇼'가 1982년 1년간 서울대 법대에서 한국 법제사 및 동양 벚제사를 강의하면서 사이어의 책을 강독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웨슬리 웬트워스의 소개로 IVF에서 기독교 서적을 공부하는 모임이 활발해졌고 '기독교와 현대사상' 영어판의 가이드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참여했던 한화룡 목사의 설명에 의하면 영어로 된 책의 전달력과 기존 참여자들의 이해력의 한계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런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안 정도였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1984년부터는 '기독교 학문연구회'에서 '기독교와 현대사상'을 공부하면서 한국말로 번역을 시작했는데 이때 참여한 사람이 김헌수, 홍병룡, 황영철, 양성만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윽과 1년이 지나서 김헌수의 주도로 책이 한국에 나오게 된다.


사이어의 책을 시작으로 리차드 미들톤과 브라이언 왈쉬가 쓴 '세상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전'이 1987년 출판되었고 이 때 번역은 황영철이 맡았다. 이 책의 영어 이름은 'Transforming Vision'이었고 1984년에 출간되었다. 이어서 기독교 세계관하면 가장 유명한 책인 '창조, 타락, 구속'을 쓴 알버트 월터스의 책이 양성만의 의해서 1992년에 한국에 소개되었다. 이 책의 영어제목은 'Creation Regained'이다. 이렇게 세계관에 대한 책들이 조금씩 번역되면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한동대에 입학했던 2001년은 세계관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져서 이제는 보편적인 단어가 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학문과 신앙'이라는 과목이나 아예 대놓고 '기독교세계관'이 존재했었다.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주제의 등장은 기존의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영혼구원'에만 집중하던 교회들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일이었다. '세계관'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이 세계에 대한 어떤 목적이나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영혼구원과 구조선 신앙을 가진 교회들에게는 '세계관'을 들여오는 순간 변화를 인정해야 했다.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문화와 제도, 국가의 행사나 정치적인 결정에 대해서 '해석'이 필요하다는 전제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일상과 직업, 각종 제도와 국가의 운영, 세계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 등 모든 부분에서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죽어서가는 천국이라는 개념에서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4. 구조와 방향으로써 세계관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마주치는 질문은 '창조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깨어지고 붕괴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그 '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이다. 모든 피조물에도 영향을 미쳐서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을 포함해서 온 우주가 모두 타락한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의 전적인 타락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잠재력을 가지고, 일반은총의 관계에서 회복의 기미가 보이는가? 이런 고민이다. 그래서 나오는 주제가 바로 '구조와 방향'의 문제이다. 초기 세계관이 들어왔을 때 죄성의 범위의 논쟁은 세계관에 있어서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쳐서, 잠재력이 아직 살아있고 어디까지가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야 하는가였다. 여기서는 알버트 월터스의 논의와 리차드 미들턴과 왈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미들턴은 구조는 창조의 질서라고 말했다. 어떤 사물의 불변적인 창조적인 구성체로써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철학의 전통으로 보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본체 혹은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월터스에게는 모든 구조가 선하다. 본체가 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방향이다. 방향은 죄와 구속의 질서가 공존하고 타락으로 인해서 창의 왜곡이 일어난 영역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과 회복을 지칭할 때 방향의 문제를 다른다. '메타노이아'라는 히브리어가 '가던 길을 돌이키다'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이런 의미에서 회개라는 것은 기존의 방향을 바꾸어서 그리스도께로 지향점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타락의 회복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회복이 드러나는 지점이 된다. 월터스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시 창조질서라는 구조에서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방향의 타락을 볼 수 있는 세계관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이 된다.


미들턴과 왈쉬는 '구리선 예화'로 유명하다. 구리선들은 우리가 체험하는 삶의 여러 측면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하나의 구리선 가닥이 모여서 전체의 구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 구조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만들어진 것이었고 구리선들은 끝과 시작이 있다. 구리선은 모든 선들이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구리선에 전기가 흐르듯이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에는 생명이라는 전기가 흐른다. 모든 삶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면서 목적을 거스르는 삶을 살게 된다. 죄는 세상의 구조라는 '구리선'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목적에 맞지 않는 방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미들턴과 왈쉬가 보은 구리선의 예화이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구조와 방향을 만드셨고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방향은 치명적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본질인 구조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회개를 통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회귀할 수 있게 된다. 죄의 영향력은 구조를 침범할 수 없다. 보수적인 신앙에서 '전적타락'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이 저지른 죄의 영향력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버리는 형국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전적인 구조를 회복시키는 예수님의 사역이 부각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가장 유명한 '제임스 스미스' 역시 방향에 있어서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것으로 인간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는 부분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은 대부분 창조와 타락을 받아드리는 것으로 보인다.



구조와 방향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개혁과 혁명에 대한 관점이 생기기도 하고, 사회적인 갱신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의 올바른 정의와 그에 대한 방향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성령충만을 통해서 개인의 영성의 회복과 함께 우리가 잘못 쓰고 있는 성적인 부분이나 공의, 영적인 은사들에 대해서 '목적에 합당한' 혹은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된다. 그럼 이러한 구조와 방향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바로 네덜란드의 신학자인 도예벨트로부터에게서 기원했다. 도예벨트(Herman Dooyeweerd, 1894-1977)는 우주법적 관념의 철학(philosophy of cosmonomic idea)으로부터 구조와 방향을 착안했다. 도예벨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수립하신 15가지의 법칙들에 종속되는데, 이 법칙들은 또 15가지의 양상 혹은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15가지 영역은 다음과 같다. 수적 영역, 공간적 영역, 운동적 영역, 물리적 영역, 생명적 영역, 정감/감각적 영역, 분석적 영역, 역사적 영역, 언어적 영역, 사회적 영역, 경제적 영역, 심미적 영역, 사법적 영역, 윤리적 영역, 신앙적 영역이다. 그리고 이 영역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고 각각에서 고유적하게 작동한다. 이것은 도예베르트보다 먼저 세계관에 대해서 다룬 아브라함카이퍼의 영역주권론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논의한 대로 구조는 이러한 법칙들이며 죄는 이러한 법칙을 없애거나 타락시킬 수 없다. 타락과 무관하게 영역들은 개현되고 발현되고 고유하게 점점 확장된다는 것이다. 죄는 단지 개체 구조들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 양태나 과정에서만 연관되는 것으로 보았다. 사건은 하나님을 향해서 영광을 돌릴 수도, 죄를 향해서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5. 한국의 기독교세계관 운동 어디로 가야할까?


연구탐사대 '나이오트'라는 스타트업과 매주 토요일 아침에 간단한 차담회를 하고 있다. 오늘은 이렇게 공부하고 있던 차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고민해오던 나이오트의 대표는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실패한 게 아니라 한국교회가 실패한게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실패냐 아니냐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양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한국교회의 실패는 '근대화 과정'에서 이중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근대적응의 실패와 근대극복의 문제로 동시에 작용했다고 보고 싶다. 근 100년간의 한국역사는 전세계 인류가 1000년간에 거쳤던 문명의 발전 단계를 모두 거쳤다. 그러다보니 식민지와 제국주의, 근대화와 경제발전, 민주주의와 독재의 시대, 자본주의와 비정규직, 계엄과 시민불복종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떠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본 것처럼 보수적인 기독교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좋았으나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응하는 것은 아쉬웠다. 어떻게 보면 다양한 도전과 변화 가운데 동성애, 낙태, 마약에 대한 대응방식으로 다른 영역에서의 변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같은 해석을 한게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저항적이고 대립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죄'의 문제를 다루다보니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그럴 것이라는 식의 세계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이 세상은 없어지고 썩어지고 타락한 곳이고, 어서 빨리 천국으로 가야 하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그러면 그런 논리는 통일교나 신천지나 교리는 다르지만 같은 구조가 된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조의 본질적인 요소가 '인간의 죄'로 타락하게 된 것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선택은 하나다. 그런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악마화'하고 '문제화'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이 사회의 부정의와 불의, 자본주의가 낳은 불평등과 가난의 문제는 단지 '기부'의 문제로 끝나버린다.


한 시대를 휩쓸던 기독교의 '크리스텐돔'을 우여곡절 끝나 지나고 나온 한국교회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이명박 전대통령의 '위에 있는 권세'자들이라는 명목하에 부정의를 눈감아주고, 박근혜와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는 '동성애와 마약'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대하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북한을 '주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옹호했다. 1980년대의 보수적인 신앙의 논리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깐 아직 한국교회는 이중과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적응과 근대에 대한 극복 모두를 말이다. 서양의 사상과 신학에 대한 '식민지 국민'의 정체성으로 사대주의로 발전하고 있는 유학파들의 입김이 아직도 신학계를 휩쓸고 있다.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 모두 맞는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또 한편에서는 그렇다고 새로운 개념이 나오지도 않아서 비판은 하지만 대안은 말할 수도 없다. 아직까지는 '기독교 세계관'에서 그나마 조그만 돌파구를 찾은 것 뿐이다.


최근에 솔리드처지가 아니라 리퀴드 처치라는 말도 나오고 마커스나 위러브, 한참 인기 상승중인 예람워십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예전에는 파라처지라고 해서 유사한 교회라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유튜브의 선방에 힘입어서 리퀴드라는 말에 찬양팀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더 나간 사람은 '가스처치'라는 말로 기체교회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900년대 초에 들어온 성취신학의 일부로 남은 기복신학은 여전히 '비나이다'를 시전하고 있고, 독일과 네덜란드 그리고 미국신학자들이 그어 놓은 선을 수입해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서양의 진리가 모든 진리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의 해석을 그들에게 맏기는 일들이 다반사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서 아무래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할 것 같다. 나이오트와도 하고 일하고 있는 곳에서도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하고 만들어가야 할 것 같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공부하고 우리의 맥락에 맞게 하나님의 일하심과 교회들의 포지셔닝 그리고 크리스천의 정체성과 우리에게 맞는 신앙과 신학을 찾는 일. 지난한 작업이 될 것 같지만, 이렇게 또 한 고비를 넘어서 다음 세션으로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선배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전수 받았으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고민하고 찾아보고 만들어보고 실행해보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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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독교 세계관의 한국적인 전통의 시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송인규 교수님의 이야기가 주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다루어졌다. 다음 시간에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네덜란드 기독교 세계관의 요소들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다. 특히 헤르만 바빙크와 도예베르트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까지 들어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구조와 그에 맞는 삶의 방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사회로 회복되도록 내가 해야할 일을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해 나가야겠다. 나혼자만 레벨업을 보니 성진우의 세계관이 이렇게 확장되고 있는데 나도 어서 여러 친구들과 세계관을 확장해서 실제로 살아계시고 현실에 역사하면서도 그 사랑을 끊임없이 실천하고 계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들어가야 겠다. 이렇게 정리하는데 거의 한 달이 걸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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