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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다슬 Oct 25. 2020

101번 취업 실패 후 찾아온 기회

나는 씩씩한 크론병 환자입니다. <10, 끝>

그렇게 난 컨설팅 스타트업에 3개월 인턴 후 정직원 전환이라는 조건으로 입사했다. 석유화학기업과 대학 컨설팅의 자료조사 업무를 맡았고 일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잘 가르쳐주는 사수와 조금 무섭지만 논리적으로 내 업무력 향상을 위해 지적해주는 사장님 등 성장하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또한, 스타트업이지만 구성원들은 모두 글로벌 컨설팅 회사 출신으로 인적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어 있었고 개업이 1년 남짓하지만 매출 10억을 돌파하는 저력을 갖고 있는 회사였다.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늘 의구심이 들었다. 이렇게 떠밀리듯, 회피하듯이 취업했는데 진정으로 괜찮냐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껏 크론병, 편입, 대학생활 등 다양한 문제를 만날 때마다 능동적으로 대처했다고 자부하던 나였기에 마구잡이 지원 끝에, 그것도 학교의 연결로 취업하게 되어 부끄러운 생각도 많이 들었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고 현재 직장에 만족하고 다닐 수 있겠지만, 처음 입사할 때부터 '마지못해' 혹은 '난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으로 입사한 곳이라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했다.(거기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을 낮잡아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분들은 실제로 이미 큰 조직에서 개인적인 성공을 거둔 분들이라 나보다 더 대단하신 분들이다.)


2달 정도 근무 후, 퇴사하겠노라 대표님께 말씀드렸다. 사유는 숨기지 않고 '여기도 굉장히 좋은 곳이란 것을 알지만 너무 급하게 취업이 된 것 같아 제가 원하는 것을 조금 더 생각하고 취업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대표님은 진심으로 아쉽다고 해주시고, 부대표님은 혹시라도 추천서가 필요하면 말해달라 하셨다. 일을 많이 가르쳐주신 사수 분은 꼭 잘됐으면 좋겠다는 격려를 해주셨다. 다시 생각해도 좋은 곳이었다.


그렇게 나의 상반기 최종 취업 실적은 63전 0승 4패(1기권패)로 마무리되었다.
이젠 다시 몸을 만들어 링 위에 올라가야 할 차례였다.


'내가 취업시장에서 정량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무엇일까'만 고민했던 게 상반기였다면, 하반기는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을까'를 먼저 고민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만, 마음이 급해 나를 시장에 끼워 맞췄던 것 같다.


나는 지속 가능한, 쉽게 말해서 오랫동안 사업성이 유지될 산업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 결과 떠오른 것은 석유화학과 보험업이었다. 석유화학은 단순히 기름과 관련된 산업이 아닌 기름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공물로 섬유, 철강, 종이 등을 만들어 부가가치가 높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매력적일 산업으로 판단했다. 보험업은 유병장수 시대에 꼭 필요한 산업으로 생가하여 마찬가지로 다른 산업에 비해 지속성이 강할 것으로 생각했다. 석유화학업과 보험업을 중심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혹은 잘 맞을 것 같은지를 고민했다. 스타트업 근무 당시 사수였던 분과 취업 관련 고민상담을 한 적이 있다. 상반기에 난 주로 문과를 많이 뽑는 '영업관리' 직무로 지원했는데, 사수는 나의 잡지사 편집장 이력을 고려한다면 전략이나 기획 직무가 어떠한지를 얘기했다. 실제로 잡지 제작을 위해서는 수많은 기획회의와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데 그런 부분을 어필할 수 있는 직무가 적합할 것이라는 의견을 줬다. 사실 상반기 준비할 때도 나 역시 기획 직무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그곳은 경쟁률이 너무 센 곳이라 피했었다. 하지만 상반기 실패를 맛본 후, '이왕 실패할 거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다 실패하자!'는 마인드로 바꾸고 직무는 전략, 기획 직무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전략으로 마음을 바꿨다.


내가 원하는 산업 두 가지에 속한 기업은 모두 지원할 것. 그리고 매력적인 기업이지만, 내가 원하는 산업이 아닐 경우 직무는 무조건 전략/기획 직무로 지원할 것을 하반기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통상적으로 하반기가 상반기에 비해 채용인원이 많긴 하지만, 39개 기업에 지원해서 15개 이상의 회사에서 면접을 봤던 것 같다. 7~8월 두 달간 다닌 회사의 인턴 생활이 내 경험에 추가된 부분도 있었지만, 상반기와 하반기의 분위기가 전세가 완전히 달랐다.  상반기부터 누적된 면접 경험치와 짧은 회사생활로 배운 간결하고 두괄식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배워서 그런지 면접 합격률도 올라갔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난 4개의 회사에서 최종면접 자리까지 갔다. 그 4개 회사의 산업은 석유화학/보험/자동차/미디어로 다 달랐으나 모두 전략, 기획 직무에 속했다. 그중 미디어 기업은 보험회사와 면접날이 겹쳐서 불참했다. 최종 면접까지 간 회사들의 매력도는 거의 비슷하여서 아직 최종 합격도 아니지만 혼자서 다 붙으면 어떡하지란 김칫국을 마셨다.


가장 먼저 면접을 본 곳은 자동차 기업인데 처음부터 크론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신입으로서 가능성에 대해서 먼저 질문을 받은 다른 지원자에 비해, 우려에 대한 대처를 먼저 해야 하는 난 불리하다고 느꼈고 당연한 수순으로 탈락했다. 다음은 석유화학 기업이었다. 사장 면접인데 내가 사는 곳을 구체적으로 묻고 부모님은 무엇을 하는지 등을 물었다. 탈락했다. 아마 내정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보험회사였다. 외국계에 모태를 둔 회사여서 그런지 몰라도 크론병이 있었는지 편입을 했는지 등 그런 한국식 면접 질문은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10만 원이 있으면 회사를 어떻게 홍보해볼래?'  혹은 '바르셀로나에 간다고 가정하고, 여행 계획 어떻게 짤래?"등 신박한 질문들이 많았다. 이 회사 면접을 보면서 꼭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운이 좋게도 합격했다.


취업을 하는 과정에서 잦은 탈락을 경험하는 대다수의 취업 준비생이 느끼는 공통점이 있다. '내 경험은 그렇게 별로인가'라는 생각이다. 난 절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세상을 살기 위해선 정량적인 경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축구 경기에서 상대팀을 이기기 위해 죽어라 뛰어본 경험, 이성에게 차여서 감정적으로 성숙해진 경험부터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어본 기억, 변화하는 계절에 달라진 향기를 맡아보는 등의 정성적인 경험도 그 사람을 형성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


계속해서 탈락을 하면서도 내가 102개나 되는 회사에 지원할 수 있던 것도, 난 나의 과거 경험들을 모두 사랑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돌담에 누워 낮잠을 잔 기억, 보험회사와 상관없는 잡지 동아리에서 동아리원과 다 같이 피자를 시켜먹은 기억, 친구들과 워터파크를 가서 신나게 놀아본 경험 등 난 정량적인 것이 부족할지라도 누구보다 매력적인 기억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취업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된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기업은 많고 나랑 맞는 기업 하나 정도는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했다.


그리고 나는 입사하게 될 회사에서 무채색의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라 나의 정성적인 경험을 소중히 하는 총천연색의 직장인이 되리라 다짐했다.

당신이 가진 정성적인 경험을 사랑해주자. 정량적인 기준으로 자신의 소소한 기억을 증오하는 건 다른 역경을 만날 때 또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꼭, 반드시 취업은 되니 조바심을 갖지 않고 꾸준히 지원하고 개선했으면 좋겠다.


<10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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