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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Apr 09. 2018

운명론자

  사람의 가치관은 어찌 보면 다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르겠다. 술자리에서 열변을 토하는 그들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와중에도 은연중에 남들의 공감과 동정을 구걸하며 자신을 위로해주기를 바란다. 그걸 듣는 대다수의 부류들은 보통 그 장단에 맞춰준다. 하지만 그들의 의중은 알 수 없겠지. 나 또한 그렇다. 장단에 맞춰 주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의 공감과 동정을 애걸복걸한다. 사실 내가 가진 여러가지 상황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편이지만 술에 취하면 자신이 햄릿인 척 떠드는 것을 나는 그리 쉽게 막을 수 없다. 말했듯이 나는 나를 무대 위 비극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뒤 나 자신을 긍정한다. "불쌍하지? 불쌍하지? 나를 알아줘. 하지만 나는 이럴 수 밖에 없어."

  한 동생이 나를 자존감 부족이라 평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 증거로 나는 궤변을, 아니면 진리를 대겠다. 사람은 양면성을 갖고 있고 그건 어떤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면서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 인간이다. 그 친구에게 이 궤변과 진리를 설파하려 했다가 관두고, "그런가보지 뭐." 라며 술 잔을 비운다. 그 친구에게도 나는 나에 대한 동정을 구걸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나에게 걱정하듯 말하지 않겠나. 그의 다음 말이 인상적이었다. "형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런데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받는 것 같아. 그럴 필요 없어요." 그의 이 말 또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니 피상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심층적으로는 틀리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책임으로 떠받는 것 같이 보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 나를 둘러싼 뒤틀린 세상을 나의 '운명' 탓으로 돌린다. 

  그렇기에 나는 운명론자다. 내가 말한 나의 상태 이외에도 수많은 것을 운명의 장난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믿고, 모든 것의 흥망성쇠 또한 타이밍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타이밍을 재거나 고려하고, 노력한 적이 없다. 결국 무턱대고 행동하고, 타이밍이 안맞았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운명이 나에게 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결국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듯이 타이밍은 여러가지의 노력으로 만들고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운명의 장난이라 울고 불며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를 구걸한다.

  그렇기에 나는 비겁한 사람이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나는 그것을 반복한다. 잘못에서 무언가를 배우더라도 어느새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세상을 저주하고, 나 만이 세상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자위한다. 너희들은 어떻게 사냐고, 당신들의 운명은 당신에게 그런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는데 어찌 너희들은 그것을 모를 수 있냐고. 하지만 나는 안다고. 그래서 힘들다고, 운명은 우리 모두를 미워하며 우리를 핍박한다고. 나는 그냥 죗값을 받기 싫어하는 것이다. 내가 자행한 여러가지 처참한 결과물에 짓눌리며 "나를 봐! 이걸 봐! 운명이란 괴물의 육중이 나를 짓누르고 있어."

  그럼에도 나는 운명론자다. 그렇지 않고는 내 정신이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정당화한다. 오늘도 나는 신을 증오한다. 무신론자인 내가 신을 저주하는 것은 참으로 웃긴 얘기다. 하지만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도 믿을 수 있다. 결국 나는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이 글로 나는 취해서 나의 불행을 부르짖으며 동정을 구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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