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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Jul 22. 2021

직장인이 쉽게 떠날 수 있는 여행

직장, 집 말고 다른 세계

어디든 떠나고 싶은 게 직장인이지만 또 어디도 떠나고 싶지 않은 직장인의 마음이 있다면 이해가 되려나?


20대엔 무조건 여행 계획을 세웠다.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을 모아 100만 원이 되면 바로 비행기표를 결제했고 100만 원을 더 모아 여행 경비로 계획했다. 혼자든, 친구와 함께하든 200만 원이면 충분했고 일 년에 두 번 정도의 여행을 계획하며 그날을 위해 직장생활을 견뎠다. 여행을 계획하는 한 두 달은 설렘으로 가득했고, 여행 기간 내내 행복했다가 다녀와서 사진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시간에 다시 한번 행복하니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 일 년이 후딱 지나갔다.


그러던 나도 30대엔 여행 후유증이 생겼다. 여행지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힘들었고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 준비할 것도, 뒤처리도 많아졌다. 체력의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업무에 복귀해서는 또 어떤가? 내가 없더라도 일정상 처리했어야 하는 일을 상사는 전에 없는 기지를 발휘해 요리조리 기한을 넘긴 채 나를 맞이했는데 휴가지에서 돌아와 그 상황을 보는 게 제일 괴로웠다. 하아…. 상사들은 그런 능력을 왜 일 미루는 데에만 쓰는 건지 정말로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훌쩍 가볍게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단 하루 휴가를 내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는 일,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을 보는 일, 먹고 싶은 음식을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먹는 일 등이 더 좋았다.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고, 다녀와서도 이 일이 그대로 있나 없나? 상사를 시험해 볼 필요도 없는 깔끔한 휴가. (물론 길게 가도 이런 눈치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당연히 장거리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다.) 장난감을 챙겨라, 여분의 속옷과 양말은 챙겼냐, 모기약, 밴드, 수영복 등등 나의 휴가와 상관없는 아이들 용품을 챙겨야 하는 2박 3일의 북적북적한 여름휴가도 조금 지쳤고. 나 혼자 훌쩍 떠날 수 있는, 좋아하는 '현실적인 여행'을 말해보자면 보고 싶은 책과 내 정신만 챙겨도 되는 지하철 일상 여행, 카페 여행, 가벼운 산책 뭐 그런 것들?




가끔 연차를 내고 출근 시간에 지하철역으로 간다. 습관적 출근이 아니라 일부러 '출근하지 않는' 내가 되어 출근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지 않고 역사 안에 있는 카페로 들어간다. 여유롭게 커피를 주문하고 책을 펼쳐 SNS용으로 사진 한 장을 찍은 후 바쁘게 지하철역으로 뛰어 들어가는 직장인을 구경하는 것으로 휴가 시작! 내가 출근하는 시간인 7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긴 했지만 8시가 넘어서 헐레벌떡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유연근무제가 많아진 요즘은 10시까지도 드문드문 출근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나도 저렇게 조금이나마 늦게 출근하면 삶의 질이 좀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어쨌든 난 지금 지하철이 아닌 카페야. 게다가 오늘 하루가 아직도 ~~지 많이 남았어!!'

내일이면 나도 다시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출근자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다시 그림자가 드리우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카페에 앉아 휴가를 만끽하고 있으니 단순한 기쁨일지언정 행복하다. 카페에 앉아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10분 단위로 여러 가지의 행복감을 챙길 수 있다. 책도 봤다가 연락을 미뤘던 친구들에게 안부 문자도 보냈다가 SNS도 했다가 하면서 시종일관 '아~ 너무 좋다!' 조그맣게 되뇌인다. 30분의 여유가 없어서 퇴근길 커피 한잔을 못 마셨는데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무료하게 멍 때리는 하루를 보내도 괜찮은 날. 나는 이런 휴가가 너무너무 좋다.!


 여름휴가 기간이 다가온다. 요즘은 딱히 여름휴가 기간에만 여행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가 공식적으로 조금 긴 휴가를 내는 기간에 대한 설렘이 있다. 휴가 기간이라는 게 정해져 있으니 급한 업무들도 덜하고 느슨해지는 분위기가 있어 그것만으로 편안해진다. 5일이든 3일이든 주말과 이어 붙은 휴가를 생각만 해도 사르르 가슴이 떨린다. 이것은…. 맛있는 것을 잔뜩 쌓아두고 어떤 것부터 먹을까 고민하는 것과 비슷하다. 코로나 19 때문에 멀리 여행을 못 가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이번 휴가엔 내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확보할까, 내게 어떤 만족을 줄까를 고민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익숙한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 힘을 얻기 위함이라면 매번 같은 패턴으로 떠났다 돌아오는 북적북적한 여행 말고 오롯하게 충만함을 누리는 개인의 시간을 확보해 보는 건 어떨까?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제아무리 멋진 여행을 다녀와도 그것이 내 일상에 연결되지 않는 동떨어진 파라다이스라면 그곳은 내 인생과 상관이 없다. 책이든, 만남이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이든 내 인생에 개입하여 세상을 달리 보게 하는 여행을 계획한다. 직장이라는 세계에서 잠시 나와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여행. 직장인이라는 캐릭터에 매여 휴가 기간이 끝나면 근심과 우울함을 가득 안고 내 자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세계를 분리하되 인생은 이어가는 휴가를 계획하고 싶다. 어디든 엉덩이 붙일 수 있는 친근함과, 언제라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적정한 거리를 알려주는 그런 여행. 이번 여름휴가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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