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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Dec 18. 2019

맥주 한 잔 할까?

엄마에게도 친구가 필요해

매일 새벽 6시 반 기상, 출근 준비와 동시에 아침 차리기, 잠이 덜 깬 아이들과 대충 아침 먹기, 출근, 정신없는 회사생활, 먹통 같은 나의 업무 적응 속도를 그러려니.. 견디려면 틈틈이 커피 한잔이 절실하다. 출근 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마시는 믹스커피 한잔, 점심시간 밥은 구내식당에서 먹는 둥 마는 둥 식도로 보내고 확보한 시간, 카페에서의 아메리카노 한잔은 나름 내 여유의 상징이었다.


혼자 마시는 커피 말고, 직장동료와의 커피 말고 친구와의 티타임 혹은 모임이라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직장도 겨우 다니는데 무슨 친구와 티타임을 가질 수 있으랴. 그러던 어느 날 출퇴근길 친구와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가 따로 맛집을 가서 밥은 못 먹어도 오가는 지하철역에서 잠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고 친구의 집 근처, 나의 지하철 환승역 라멘집에서 1시간 만남을 약속했다. 우린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비슷한 시기에 아이 둘을 낳았고 친정의 도움을 받으며 복직을 한 그 이름 찬란한 워킹맘이었다. 그래서 서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고 서둘러 밥을 먹고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구 던져도 미안하거나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1시간이 되면 아쉬움은 대충 구겨 넣으며 안녕~하며 만남을 종료할 수 있어 부담 또한 없었다.


자고로 여자 친구들과의 만남이란 맛은 물론이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인별 그램에 사진 한 컷 올리며 뽐낼 수 있는 장소를 일주일 내내 고민하며 선정한 곳에서 이뤄져야 하는 게 정석인데 퇴근길 환승역 라멘집이라니 과연 트로트 노래 제목 같은 만남이랄까. 만나서는 또 어떻고. 예뻐졌다~좋은 일 있냐, 살 빠졌다 다이어트하냐의 질문으로 가볍게 워밍업 하며 직장 이야기, 아이 크는 이야기, 시댁 이야기 등 주변 이야기를 돌아 돌아 정작 만남의 이유였던 메인 이슈는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한 채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기에 밑도 끝도 없이 바로 본론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더 깊이가 있었다.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가 아니었다. 나에게도 친구가 있다는 그 사실 하나였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회사에서는 일에 시달리는 일개 조직원 일뿐이지만, 생기 넘치던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만이 아는 보물을 꺼내보는 기분이었다.  지하철 환승역 라멘집에서 우리는 세련된 가로수길 이자카야를 떠올릴 수 있는 20대를 공유하고 있었고 촌스럽기 그지없는 자주색 교복을 떠올리며 그땐 그랬지 라고 웃을 수 있었다.


분명 20대의 이자카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보통의 동네 라멘집이었지만 우리는 그때보다 더 풍성 해졌고 여유로워졌다. 내 한 몸 추스르기 바빴던 이기적인 내가 아닌 나와 닮은 아이까지 책임지며 여러 역할을 해내는 어제보다 더 나은 멋진 엄마이자 사회 구성원이었다.

미묘한 경쟁의식을 숨기고 서로 가진 것을 은근슬쩍 자랑하고 내비치는 미묘한 여자 사람 친구사이가 아닌 퇴근길 안경 쓴 모습도 개의치 않고 만나며, 라면 한 그릇에 맥주 한잔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이가 되었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로 그동안의 소원함을 한방에 해결하려는 성급함이 없는 사이. 성공한 사람은 바쁜 사람이라는 공식이라도 있는 듯 이리저리 튕기며 어렵게 약속을 잡아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운 복잡함도 없는 사이. 나와 내 친구가 성인군자 같은 사람이어서 이런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질투를 숨기고 상대방을 칭찬만 하던 때가 있었고 네모난 정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 예쁘고 좋은 것들만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20대엔 새침한 그런 시간이 필요했고 30대 후반,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 과정 일뿐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마음이 퍽퍽한 날, 언제든 환승역에서 불러낼 친구가 있다는 생각은 그 만남이 자주 있든 일 년에 한 번이든 나의 든든한 카드가 되었다.

퇴근길 맥주 한잔.

때로는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매일의 힘이 되어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그날의 라멘과 맥주 한잔이 아직까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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