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그 이상의 도시
기억에 남는 도시를 꼽으라 하면 먼저 도시의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테지만 도시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는 건축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특히 깊은 역사를 품은 건축물들이 많은 도시라면 낯섦과 이국적임이 더욱 배가된다. 그런 곳들을 걷다 보면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도시와 현재의 내가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뭄바이의 풍경에는 유럽이 심어져있다. 포르투갈과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슬픈 시간의 잔재라고 봐야 할까? 독립은 이미 오래전에 했으니 조화롭다고 보는 게 맞을까? 아니면 이로 인해 독창적인 문화가 탄생했으니 찬미해야 할까? 도시를 둘러보다 보니 아름답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지만 동시에 뼈아픈 식민지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엔 생각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예술적이다.
관광지들이 촘촘하게 모여있는 뭄바이에선 도보로 이동할 일들이 많았는데 걸어 다닐 때마다 독특한 건물들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빼앗겼다. 특히 남쪽 구역부터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월드 헤리티지 사이트까지는 영국 통치 시기에 지어졌던 유럽식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흰자로 슥 빠르게 보면 유럽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인도의 건축양식들을 많은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두 문화가 융화되어 만들어낸 특색 있는 건물들은 정말 흥미로웠다.
뭄바이의 건축 스타일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빅토리안 고딕과 아르데코이다. 이렇게 두 가지 스타일이 생긴 건 영국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군사기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뭄바이를 도시화 시키기 위해 두 차례 도시 개발을 했기 때문이다. 주로 공공기관들이 있던 차트라파티 시바지 터미너스 에어리어 (Chhatrapati Shviaji Terminus Area)와 오벌메이단(Oval Maidan, 남뭄바이의 공설운동장) 주변이 빅토리안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추후 주거지역들이 아르데코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건물들을 관찰하다 보면 중동의 느낌이 나는 돔의 형태라든가 아치의 끝부분이 모아지는 창문과 문들, 테라스 디자인, 창살 문양, 조각 장식 같은 디테일들이 유럽에서 본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 전문가가 아니라 이 아름다움을 자세히 설명하기가 어려운 게 아쉬울 따름이다.
어떻게 이런 독특한 양식이 생겼나 궁금한 마음에 자료를 좀 찾아보게 됐는데, 이런 디자인이 나오게 된 이유는 영국 통치 이전에 무굴 제국이 인도를 지배한 역사에 있었다. 무굴의 영향으로 이슬람 문화 건축 양식인 사라센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인도의 힌디 문화와 결합되어 인도-사라센 양식이 생겼다고 한다. 이 양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타지마할이다. 이후 영국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빅토리안 고딕 양식이 들어왔는데 인도-사라센과 혼합되어 인도-고딕이라는 고유한 양식으로 발전이 되었다고 한다. 기막힌 퓨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반나절 동안 도시의 중심에 있는 오벌메이단(Oval Maidan, 남뭄바이의 공설운동장) 광장의 동쪽 주변부터 시작해 서쪽의 마린 드라이브까지 여유 있게 걸어보기로 했다.
오벌메이단은 아주 광활한 흙바닥 운동장인데 여기 안에서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인도의 빅벤이라 불리는 라자바이 시계탑(Rajabai Clock Tower)과 뭄바이 대학, 고등 법원 등 웅장한 인도 고딕 양식 건물들이 쭉쭉 뻗은 야자수들과 어우러지는 아주 멋들어진 스카이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도 이 뷰를 보기 위해 운동장 중간을 가로지르는 도보로 걷는데 주변에선 수많은 아이들, 청년들이 국민 스포츠인 크리켓을 즐기고 있었다. 햇볕 쨍한 오후에 아주 활력이 넘치는 광경이었다. 이 와중에 혹시라도 잘못 친 공에 맞으면 어떡하나 은근히 걱정하긴 했지만 몇 장의 인증샷을 건지는데 성공했다.
도보를 따라 오벌 메이단의 서쪽에 위치한 입구로 나가니 주거, 상업 시설이 있는 구역이 나왔다. 이곳이 20세기 초에 마린 드라이브의 건설과 함께 재개발된 곳인데 이곳부터는 모던한 아르데코 양식을 볼 수 있었다. 동쪽보다는 훨씬 심플한 형태의 건물에 기하학적인 패턴이 들어간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인도의 터치가 들어가 인도-데코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뭄바이에서 이 구역을 잘 보존해온 덕에 세계에서 2번째로 (첫 번째는 마이애미) 가장 넓은 아르데코 구역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사실 미리 알아보고 온 정보들이 많지 않아서 걸어 다니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계속 구글로 검색하면서 돌아다녔는데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 덕에 참 볼 것들이 많아 반나절이 짧게 느껴졌다. 이 글에 쓴 대부분의 지식들이 뭄바이를 다녀오고 나서 찾아보고 알게 된 것들인데 공부를 좀 하고 가서 여유를 가지고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라며 핑계를 대본다… 혹여라도 다음에 가실 분들이 이 약소한 글을 참고하여 도시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더 즐길 수 있다면 뿌듯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