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인생은 미완성'(이진관 부름)이란 노래가 유행한적이 있었다. '인생'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안어울리는 어릴 때였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따라부르곤 했던 노래. 노랫말중엔 사랑은 미완성이란 대목도 나온다. 가을의 끝자락인지 겨울의 첫자락인지 모를 얼마전 다녀온 짧은 여행에도 이름붙일 수 있겠다. 여행은 미완성이라고.
살다보면 문득 바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충동적으로 밤새 달려 새벽녁 동해의 일출을 보고왔노라는 사람들도 더러 보았다. 그런데 이곳 캐나다에서는 해안가에 위치한 지역이 아니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태평양을 보러가자면 서쪽으로 비행기로 다섯 시간, 동쪽으로 비행기로 두시간여 날라가면 대서양에 닿으니까 바다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대신 군데군데 아주 커다란 호수가 있다. 아담한 반도땅에서 온 한국인의 눈엔 저게 어떻게 호수일 수 있는가 할 정도의 규모다. 모래사장도 있으니 바다나 다름없다 하고 억지로 믿으면서 보고 올 때도 있다.
내가 평소 꿈꿔왔던 여행은 이런 것이다. 이를테면 셜록홈즈의 전 작품과 해리포터를 읽고 떠나는 영국 여행, 레 미제라블 읽고 뉴욕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 여행, 빨간머리 앤 전 8권 완독 후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로의 섬 여행. 태백산맥 재독후 지리산 등반. 여행 자체만 해도 쉽게 단행하기 쉽지 않은데 그 전에 숙제(?)가 있으니 계속 버킷에 담긴 리스트로 간직돼온 것들이다.
11월에 단 며칠 시간이 나서 간만에 기를 쓰고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시간이 빠듯해서 멀리는 못가고 그나마 젤 가까운 뉴욕을 떠올렸다. 자신과의 타협. 레 미제라블은 아직 읽지 못했으나 순서를 바꾼들 어떨까. 그런데 브로드웨이에 늘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줄 알았는데 지금은 하지 않고 있었다. 참 아쉬웠다.
어느날 우연히 핸드폰에 저장돼어 있는 이북중 읽지 않고 있는 캐나다 역사책이 있어 조금 읽어보다가 흥미가 생기는 곳이 있었다. 동쪽 끝 대서양 연안의 노바 스코샤라는 주였다. 작은 스코틀랜드라는 뜻의 작은 주. 문학작품이 아닌 역사책을 읽다가 여행을? 동기가 다소 생뚱맞게 느껴졌지만 갑자기 바다에 대한 욕구가 솟았다.
거기다 또 자신과의 타협을 하기를, 빨간머리 앤은 오래전에 5권까지 읽고 중단했지만 절반 이상이니 거기도 가보자 했다. 알고보니 노바 스코샤의 주도 핼리팩스에서 배타고 75분 가면 있다고 하니뜻하지 않게 이렇게 버킷 리스트를 실현하는구나 싶었다.
핼리팩스는 왠지 아기자기하고 정겨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욕심부리지 않고 느긋하게 임했다. 그리고, 바다에 갔다. 대서양이라니. 그렇다고 태평양이 친숙할리는 없지만 대서양은 더더욱 낯선 이름이 아닌가. 바다를 마주하자마자 탄식이 나왔다.
바다는 바다네. 호수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등대. 등대의 존재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래가 아닌 바위에 이어진 드넓은 바다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등대지기.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위에 자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아, 종종 듣는 노래도 아닌데 어릴적 불렀던 노랫말이 어떻게 고스란히 생각이 날까. 그러다가 잠시 기념품 가게에 다녀와 바다를 바라보며 뜨거운 코코아를 마셨다. 참 제격이었다.
프린스 에드워드섬엔 가지 못했는데 핼리팩스에서 섬까지 운행하는 페리를 수리중이라 잠시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했다. 이 또한 아쉬웠지만 역시 버킷 리스트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없겠거니 받아들였다. 빨간머리 앤의 남은 3권을 다 읽고 다시 오자 마음먹었다.
깊고 푸른 대서양과 등대하나를 가슴에 품고 늦가을 짧은 미완의 여행을 마쳤다. 바라만 보아도 가슴 벅찬 대서양을 언젠가 배를 타고 건너 내 기필코 앤을 찾아가리라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