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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부끄러움

by 오리진 Feb 26. 2025

'민낯들'(사회학자 오찬호 지음)이란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저자가 대학원에 다닐 때,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배포하는 일을 하면서 누군가 자신을 보는게 싫었다고 한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공부하면서 힘들게 사네' 와 '공부는 언제하나?'하는 조롱의 경계선에서 무례한 분석 대상이 되는게 싫어서. 


그래서 자신의 그런 사정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왔는데, 교직원이 선의로 모 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했고, 새벽엔 신문배달, 아침엔 무가지 배포, 저녁엔 대학원에서 조교 근무한다고 수여식장에서 소개를 하는데 자신은 비루함을 느꼈다고. 


지난 팬데믹 시절, 한국은 이른바 'K-방역'이라 불리우는 방역 시스템하에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은 것으로 유명했다. 개인들이 전체를 위해서 기꺼이 개인정보 수집에 동의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것에도 큰 반발을 하지 않음으로써 성과를 거두었다. 감염자들의 동선을 추적하고 그것의 공개는 비본질적이게도 그들의 하는 일이나 삶의 반경들이 그려지면서 인터넷상에서는 함부로 남의 사생활을 재단하는 일이 예사롭게 자행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콜센터에 근무하면서 녹즙 배달을 하는 40대 여성의 삶이 고스란히 소개되었고 대중에게 '착한 동선'이라고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책에서 내가 공감하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정말로 두려운 건 내 동선이 그것뿐이라는 처참함이다. 자신만의 내밀한 삶을 공개하기 싫은 것처럼, 삶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도 누군가에게는 깊숙이 감추고 싶은 정보다.  


인간이 생계를 위해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부끄러울 일이 아닌데 그렇게 까발려지고 뭇사람들로부터 평가받을 때 설령 열심히 산다는 칭찬(!)일지라도 당사자가 느끼는 초라함, 남루함, 저자가 느꼈던 비루함, 충분히 알만하다. 딱 알맞은 감정은 아닌데 묘한 수치심같은 것 말이다. 


딸아이가 요즘 일하고 있는 공차(대만식 밀크티를 파는 곳)에 오는 한 한국인 손님 이야기를 해줬다. 자기가 일하는 날마다 꼭 온다고. 여러번 보게 되니 외향적인 듯한 그 손님이 그러더란다. 

"매일 일해요?" 


그 말을 들은 딸아이는 갑자기 자기안에 모호한 수치심이 올라왔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야 그게 뭐가 부끄럽냐. 오히려 그 사람은 또 그럴 수도 있어. 아, 오늘도 저 사람이 있네. 사람이 음료따위를 매일 마시고 사냐고 그럴거 아닌가. 아, 좀 부끄럽다... 다른 집이랑 돌아가면서 가야겠다." 할 수도 있다고. 


'매공남'(매일 공차 마시는 남자)이야기를 하면서 낄낄거리다가 나이트 근무 시간이 되어 밤시간에 집을 나왔다. 눈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낮에 기온이 올라가 녹았다가 해가 지면서 표면이 살짝 얼어있었나 보다. 순간 미끄러지면서 넘어졌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오려다 말고 내가 자동반사적으로 한 행동은 다른거 살필틈 없이 발딱 일어나 차에 오른 것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그때야 비로소 무릎이 아프고 엉덩이가 축축하다는 느낌이 감지되면서 어쩐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지각하지 않으려는 필사의 몸부림은 직업인으로서  마땅한 소양일진대 어이하여 나는 부끄럽지 않은 부끄러움에 남몰래 얼굴을 붉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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