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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부터 Oct 31. 2024

코끼리? 코뿔소? 네가?

친구를 놀리는 정현이

“쌤, 오정현이 자꾸 놀려요. 그만하게 해 주세요.”


오늘의 민원 시작.

중학교 1학년 교무실, 쉬는 시간은 늘상 민원인들로 북적인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의 예은이. 심상치가 않다. 매일 민원을 처리하다 보면 민원인의 표정만 봐도 사안의 심각성을 바로 감지할 수 있다. 이게 내공이고 전문성이라 믿는 나는 15년 차 교사다. 중학생 민원처리 전담사로 거듭나는 중이라고 표현해도 큰 무리는 없다. 교사의 전문성은 티칭 스킬만이 아닐 터. 학문의 세계를 넘어 우리는 아이들의 민원을 살피고, 표정을 읽는다.


“여기 앉아봐.”


표정으로 추측한 사안의 심각성이 높은 편일 때면 의자를 꺼낸다. 작고도 동그란 의자. 서서 끝내도 충분할 일이 있고, 앉아서 들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의자를 꺼낼지 말지에 관한 빠른 판단 역시 전문성의 일부일 터.



예은이는 까만 가르마를 정갈하게 타고 다니는 얼굴이 하얀 여자 아이이다. 조용하면서도 당찬 구석을 가졌다. 그런 예은이를 우리 반 남자아이 정현이가 놀렸단다. 무려 ‘코끼리, 코뿔소’라고 했다나. (여기 중학교 맞지? 유치원 아니고? 왜 내가 부끄럽지.)

한두 번일 때는 그럭저럭 무시하고 넘어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졌단다. 요즘 들어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 들리는 그 놀림에 예은이는 마음이 무척 상한 눈치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진 예은이의 이야기가 끝났다. 예은이의 이야기에 내가 놀란 이유는 두 가지.

먼저 예은이는 코끼리와는 거리가 먼 아이라는 점이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놀림인데도, 당찬 예은이인데도, 학교에 오기 싫은 마음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다고 한다.


‘예은아 너 코끼리 같이 엄청나게 크지 않아. 그거 알지?’

‘네. 근데요. 제 코에 자꾸 뾰루지가 나거든요.'


머뭇대며 이어지는 예은이의 말. 자꾸만 소리를 들으니, ‘내가 진짜 코뿔소 같은가, 내가 이상하게 생겼나, 애들이 나를 싫어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꾸 들리는 황당한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점점 몸이 움츠러든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놀란 이유 두 번째는, 민원의 대상이 ‘정현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여느 중학생 아이들처럼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인사도 곧잘 하고 공부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복도를 지나다 친구를 ‘돼지 XX야’라고 부르는 정현이를 혼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친한 친구끼리의 장난이라며 당한 친구가 정현이 편을 들고, 정현이가 사과를 하며 마무리했었지.


친한 친구끼리 서로 놀리며 장난을 치는 것도 안될 일인데, 가만히 있는 친구를 상처 주는 말로 놀린다고?

정현이와의 깊은 대화가 필요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정현이가 겨우 내미는 한 마디.

.

.

.

“장난이었는데요……. 원래 애들이랑 그러고 놀아요.”


정현이가 한 일을 '장난'이라는 말을 빼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읊어주었다. 예은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음속에 들어간 양 말하다 보니 점점 더 속이 상했다.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하다가 이내 점점 아래로 추욱 처지는 두 눈, 벌리지도 다물지도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입술. 그래 니가 지금 엄청 놀랐구나. 그나마 다행이네.


예은이와 정현이의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전해졌던 것일까. 관련 제보가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좀처럼 교무실의 깊은 대화에 초대될 일 없던 아이들이 평소 정현이 말에 기분이 나빴던 적이 있다며 살짝 귀띔해 주었다. (평소 이르지 말고 스스로 해결해 보라고 가르치지만 이럴 때는 제보자들이 고맙다)


자신이 별로 자랑할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에 대해, (예를 들면 수업 시간에 문제를 틀렸거나, 발표를 하다가 말실수를 했다거나, 옷에 뭐가 묻었다거나 하는 것들.)

혹은 그냥 복도를 걸어가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모습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지적을 하는 정현이의 말에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싫었다는 내용이었다.


정현이는 함께 노는 친구들에게만 아니라 주변 친구들을 평가하고, 지적하는 말(그 내용이 맞든 아니든 간에)을 수시로 한 듯하다.


다시 한번 동그란 의자에 앉은 정현이. 잠깐 사이 부쩍 진중해진 표정이다. 나도 진지하게 얘기해 본다.


"정현아, 누군가를 평가할 권리가 너에게는 없어. 필요하지 않은 평가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너의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기를 원하는 건 아니지?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야 네가 멋진 건 아니야. 오히려 반대로 하는 게 더 멋있는거야." 


"예은한테 진짜 미안해요. 사과하고 싶어요."


여러 정황과 이야기를 다각도로 종합 심사 본다. 그리고 예은이와 나는 정현이가 상대를 아프게 할 작정으로 상처 주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 이제 이번 민원의 마지막 장을 맺어 볼까.




널찍한 교무실 탁자에 나를 가운데에 둔 채 마주 앉은 정현이와 예은이. 상처 입은 솔직한 마음, 미안한 마음, 앞으로의 약속을 나눠 본다. 정현이의 마음을 이해해 준 예은이도, 달라질 기회를 얻은 정현이의 얼굴도 모두 가벼워 보인다. 교실로 가는 복도에서 정현이는 예은이에게 다시 한번 조용히 사과를 건네는 눈치이다. 예은이 마음의 상처가 잘 아물기를. 이후 나에게 제보를 해 왔던 아이들에게 은밀히 물어보니, 정현이는 예전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덜 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금은 자랐다 보다. 그래 우리 정현이 나쁜 아이 아니에요.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을 높이지만, 작은 사람은 큰 사람을 깎아내린다.]


정현이는 누군가를 보면 그 사람을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떠오르는 아이였다. 그냥 생각이 나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장난을 걸고 싶어서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다른 사람의 지적할 거리가 너무나 잘 보인다는 정현이에게는 어떤 마음이 숨겨져 있을까. 


‘나는 다른 애들보다 잘났어. 지적을 해서 멋진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라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아직 미숙한 정현이는 자신의 똑똑함, 잘남을 티 내고 싶었다. 그리고  방법으로 당사자가 원하지 않은 ‘지적, 평가하는 말'이라는 잘못된 수단을 선택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말이다.


아이를 키울 때 무조건적인 칭찬을 보내곤 한다. 어디에서든 어깨를 쭉 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리라.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평가하여 어깨를 으쓱이게 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봤으면 한다. 


그리고 ‘사람은 멋진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 여러 가지를 골고루 가졌다는 것, 나 자신도 그렇다는 것,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줬으면 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좋은 면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으면 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높여 주는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 역시 정현이를 보며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내게 주어진 영역이 아닌 부분까지 마음대로 평가하고 지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아닌 척 하지만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평가하고 무시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을는지. 모든 사람은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라는 것, 누구도 누군가를 평가할 이유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중학생 아이들의 세상을 보며 배운다.                  

                                

내 책상 밑의 동그란 의자. 여기에 앉으면 아이들은 자기 얘기를 술술 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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