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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부터 Dec 05. 2024

13살의 아보하

아주 보통의 하루라면 괜찮지 않아?

재영이는 우리 반의 곰돌이 시계이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등교해서 교실 문을 여는 아이. 하루도 빠짐없이 교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등교하는 친구들을 반긴다. 우리 반 친구들 중 재영이의 상냥한 아침 인사를 받아 보지 않은 아이는 없을 것이다. 선생님보다 일찍 등교하여 출근하는 나에게 반달 모양의 눈으로 인사를 건네기도 여러 번.

한 번은 쉬는 시간 복도를 지나가는데 재영이가 주렁주렁 짐을 잔뜩 들고 있어서 물어봤더니, 친구들 물건이었다. 이동 수업을 하고 난 뒤 친구들이 잊고 간 책과 필통, 텀블러를 한 아름 챙겨서 가져다주는 우리 반 훈남. 꼼꼼하고 마음씨 따뜻한 재영이. 재영이를 보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까? 재영이의 또 다른 모습을.




그는 우리 반 단골 민원인이다. 악성 민원인아니지만, 반갑지만은 않은 단골손님이랄까. 민원의 시작은 주로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선생님, 제가 좀 속상해요.


-애들이랑 얘기하다가 제가 친구한테 뭘 좀 물어봤거든요? 근데 대답을 안 했어요.
-지나가면서 저랑 부딪혔는데 사과하지 않았어요.
-제가 수정테이프를 빌려줬는데, 사용하다가 망가뜨렸어요.
-지나가다가 애들이 막 휘두르는 옷에 맞았어요.
-제가 여행 다녀와서 준 선물을 아무 데나 막 두더라고요.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데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이 교실 문을 확 닫았어요.
.
.
.
.
.
왜? 친구가 왜 그랬대?

몰라요.





재영이는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겨도 친구들에게 묻지 않는다. 친구들의 행동에 그저 속상하고 답답해할 뿐이다. 친구들은 재영이가 왜 기분이 상했는지 영문을 모른다. 아마 기분이 나쁜 것도 잘 모를 것이다. 재영이 기분을 궁금해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재영이의 모습은 늘 곰돌이처럼 포근하니까. 그러다 보면 또 재영이가 기분 나쁠 일이 자꾸만 생기는 악순환. 축 처진 눈을 한 재영이에게 친구가 왜 그런 거 같냐고 물으면 결론은 비슷하다. '아무래도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걔는 원래 좀 그래요.'

원하는 것을 물으면 사과를 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바로 들어주지는 않는다.

교사로서 언제나 양쪽 입장을 듣고 판단하는 것이 나의 철칙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자신이 겪은 상황만 생각하지, 상대방의 입장은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겪은 상황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단다." 원래도 사람은 자기가 먼저인데,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더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항상 말한다. 미안하지만 선생님은 언제나 무조건 네 편은 아니라고. 얘도 내 학생, 쟤도 내 학생이니까. 너의 입장이 있는 것처럼 상대의 입장도 있다고.

그래서 재영이가 불편 사항을 신고하러 나를 찾아오면 '먼저 걔한테 가서 물어봐. 사정을 들어보고 납득을 하겠으면, 이해해 주고. 이유가 이해가 안 되거나 영 기분 나쁘면 그때 다시 찾아와. 중재해 줄게.'라고 말한다. 선생님이 끼어들면 상대 아이는 아무래도 괜히 혼나는 느낌이 들어서 편하게 얘기가 잘 안 된다. 그래서 아이들끼리 먼저 잘 해결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돌려보내곤 한다.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도 있으니까.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하는 이유(출처:네이버 블로그)

 

아이들이 재영이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이유는 대개 '부주의함', '세심하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특별히 재영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아이들이 재영이 마음을 상하게 할 이유도 없다. 마음이 못된 아이보다는, 생각이라는 것이 없는 아이가 더 많은 것뿐이다. 재영이가 속이 상하는 여러 일들은 어떻게 보면 다른 생각 없는 친구들은 그냥 넘어갈 만한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친구가 말을 걸면 성의껏 대답해 주는데, 쟤는 안 그러네. 내가 싫은가 보다.' 하지만 그 친구가 재영이가 싫어서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애들은 선생님이 10초 전에 얘기한 에도 딴소리를 한다. 아이구 속 터져. '쟤는 지나가면서 나를 치고 사과도 안 하고 그냥 가네. 나를 무시하나 봐.' 이럴 때 상대방을 불러서 양쪽의 입장을 들어 보면 그 아이는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한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에? 그때여? ㅇㅇ이가 제 머리 치고 도망가서 잡으러 뛰어 갔는데여? 아 그때 재영이랑 부딪혔나?"
"복도에서 뛰지 마라. 그때 재영이 네가 치고 갔대. 생각해 보고 사과해."
"넵"


그렇다. 재영이는 마음이 아주 섬세한 아이이다. 갈색 털의 곰이 아니라 희고 깨끗한 털을 가져서 작은 먼지에도 쉽게 더러워지는 곰돌이.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하고 생각 없이 행동하는 보통의 중학생 아이들과는 다르다. 의도와 생각을 담아 하나하나 세심하게 행동하는 재영이에게, 지금 바로 떠오르는 행동을 별 생각 없이 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모두 뾰족한 가시가 되어 재영이의 마음을 쿡쿡 찌른다.

그 가시는 결국 자신을 아프게 해서 '저만 빼고 애들이 다  지내는 것 같아요'라는 문장까지 뱉어내게 한다. 그 말이 재영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해야 이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교사로서 고민하게 된다.





보드랍지만 쉽게 깨지기 쉬운 마음을 가진 재영이가 보통의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 가길 바라본다. 다들 나처럼 섬세하게 나를 배려해 주기를 잔뜩 기대해서 실망하게 되는 하루가 아니었으면. 그리고 자신이 특별히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무심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것도.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줄을 잡아당겨, 깊은 곳으로 꺼지지 않기를.


그래서 재영이가 찾아오면  가지를 주문한다. 먼저, 그 친구가 왜 그랬을지 생각해 보기. 상대의 입장에서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를 추측해 보자.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 교실 문을 확 닫아버린 친구는 내가 싫어서, 나를 못 들어오게 하려고가 아니라, 교실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싫어서였을 지도.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둘째, 그러고도 이해가 안되면 친구에게 물어보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해 보기. 좋은 친구라면 너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다음부터 조금 더 조심해 줄 거야. 물론 또 까먹을 수 있음 주의. 재영이도 그 친구의 마음 잘 들어주는 것은 당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내 마음의 그릇을 점점 더 크게 만들기. 상처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지는 말자. 상처가 될 만한 일이 왔을 때 툭툭 튕겨낼 수 있기를. 이건 별일 아니야라며 작은 상처를 크게 받아들이지 말자. 와다다다 복도를 뛰어가던 친구가 나를 툭 치고 가버리면 '아 뭐야. 기분 나쁘네 저 인간. 한 번 봐줬다.'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이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저 요새 재밌어요. 행복해요.' 하는 아이는 없다. 보통은 '괜찮아요. 힘들어요.'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다른 애들은 다 좋아 보여요.' 화장실에 다녀와서 웃고 있는 친구 무리를 보고 느끼는 쓸쓸함. 같이 축구를 하다가 나만 뒤처져서 공에 발을 대지 못하고 헉헉 대고 있을 때의 소외된 감정. 수업 시간 나만 빼고 다 공부를 잘하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함. 그 순간의 마음 때문인 걸까. 다들  지내는 것 같은데 나만 별로인 것 같다는 생각이 아이들 마음속에 많이 있다.

그럴 때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오늘 하루 학교에서 선생님께 크게 혼나지 않고, 마음이 맞는 친구 한 두 명이랑 편하게 얘기하고, 급식 잘 먹고. 종례 시간까지 학교에서 별 탈 없이 잘 있다 가면 대단히 훌륭한 하루라고. 인싸가 되어서 친구들이 다 좋아하고, 수업 시간에 척척 다 해내서 선생님께 계속 칭찬 많이 받고, 엄청나게 자랑할만큼 재미있는 일이 있는 애, 우리 학교에 아무도 없을걸? 나는 그런 학생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선생님은 너희들 이대로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다행히 2학기에 들어서 재영이는 나를 조금은 덜 찾아온다. '잘 지내고 있어? 혹시 힘들게 하는 친구는 없고?'라고 은근히 물어보면 '네 뭐. 요새는 특별히 나쁘진 않아요.'라고 대답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래 그 정도면 다행. 선생님이 너를 아주 행복하게 해주는 것까지는 못하겠지만, 이만하면 되었지  뭐.

나도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보통의 하루를 잘 살았음에 감사해 본다. 아이들 장난에 교실 TV가 깨졌지만 누가 그랬는지 금방 찾았고, 수리된다니까 뭐. 다른 반 애들이 무단외출을 해서 줄줄이 걸렸는데 거기에 우리 반 아이가 없었고. 그러고 보니 오늘 보통의 하루가 아니라 완전 럭키비키자나.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아주 보통의 하루 속에서도 행복은 충분히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오늘 보통의 하루를 잘 살아보자.
오늘 같은 그저 그런 날들이 벽돌처럼 쌓여서 예쁜 집을 만들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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