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학교의 설렘이 있었다
며칠 전, 책 읽는 모임인 노작 홍사용문학관 소설반 단체 카톡에서 내가 어릴 적 '학습부진아"였음을 살짝 고백했다. 의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읽고 있는 <82년생 김지영>의 책 내용을 언급하다 말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뭐 충분히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몇몇 선생님들은 의아해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초등 입학 전까지 집에서 책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몇 권은 있었지 싶지만. 아무리 섬 출신이었다고는 하나 집에 그렇게 책이 없었던 것도 신기할 일이었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야 하는 어려움을 책들도 알았던 걸까. 건너가기 싫다고. 내리사랑이라기보다 내리 의무를 졌던 형제자매들의 맞이들은 또 어떤가.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며칠 전에 큰언니가 가르쳐준 이름 석자 겨우 외우고 가기에 바빴다. 그랬더니 호적 이름이 바꿔져 있어 출석부에서 그 새 이름을 계속 부르는 담임을 보며 '제 이름 아닌디라.'했던 기억이 왜 그리 생생한지. 집에 돌아와 내 이름을 다시 써보며 내 이름인가 했었다. 신고 갔던 검정고무신이 친구들 신고 뒤엉켜 다른 신발을 신고 왔던 그 첫날의 복잡한 기억. 그런데 학교라는 장소는 뭔가 설렘은 모락모락 가슴 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받아쓰기는 매일매일 뒤쳐져 남아서 익히고 오기를 수십 차례였었다. 그 무렵부터 국어 받아쓰기가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지금의 아이들은 받아쓰기 급수표라고 몇 급을 지정해서 보지만 그때는 배웠던 책 범위 전체가 받아쓰기 대상이었다. 그러니 20점 30점이 그리 나쁜 점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학교생활이 싫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머리를 몇 번 쥐어박는 것은 선생님의 커다란 권리인 줄 알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데 내 그림을 도둑맞았던 사건 이후, 나도 무언가 잘하고 잘해서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몸과 정신이 불편했던 한 친구가 내가 그린 그림을 계속 자기 그림이라 우겼던 사건이 발생했다. 그 친구는 사건을 자세히 설명할만한 언어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결국 선생님은 '내 그림이야. 내 그림이야.' 소리치는 아이의 편을 들어주고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그게 초등 2학년 때였다. 공부 못했던 아이의 말은 무슨 말을 해도 더 잘 먹히지 않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학습부진을 겨우 살짝 벗어난 게 초등 4학년 학기말이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나를 살짝 불러 '내가 학년 우등상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사실 우등상 성적까지는 아니었지만 노력하는 모습이 예뻤다고 했다. 엄마가 뇌물을 싸들고 학교를 찾아갔단 것도 아니었다. 다른 예쁜 아이들처럼 단정하지도 않았었다. 어쨌든 내 머리를 쓰다듬었던 그 선생님이 가끔 추억 속에 소환되기도 한다. 학교생활이 더욱 즐거워졌다.
내게도 어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는 그 시절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른다. 어릴 적부터 책을 가까이했던 사람들과는 문장 속에서 발현되는 언어력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 차이가 있겠지만, 평생 글을 가까이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언어를 접하는 방법을 알게 된 요즘은 일상이 즐겁기만 하다. 학습부진을 스스로 깨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다른 세계를 탐닉하는 호기심을 자극시켜주는 원동력을 품게 되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