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나 무를 절여 갖은양념으로 버무린, 맵고 달고 짜고 시고 시원, 하기까지 한 음식. 김치로 만든 찌개와 김치를 넣은 볶음밥을 먹더라도, 김치반찬을 내놓는 진정한 김치의 왕국.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라면 먹을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내내 혼자 살았다. 독립이 빠르다면 빠른 편인데,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독립의 제일 첫 거주지는 기숙사였다. 돈을 더 주면 1인실도 가능했지만 나는 조금 더 저렴한 2인실에 거주했다. 2인실은 학기 단위로 같이 살게 되는 룸메이트가 랜덤으로 바뀌었다. 기숙사였기에 당연히 취사는 절대 되지 않았고, 냉장고도 복도 중간에 공용으로 쓰는 형태였다. 밥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급식이 제공되었다. 물론, 추가금액을 지불하고 말이다.
그 이후에는 고시원에서도 살았고 흔히 자취방이라고 불리는 아주 작은 단칸방에도 살았으며, 방 4개의 주택을 같이 쓰는 하우스 셰어도 해보았다. 참, 푸켓에서 5개월간 산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모텔에 장기 투숙 하기도 했다. 다양한 삶의 터전에서 눈칫밥 먹은 끝에 살게 된 곳이 5.99평짜리의 작은 원룸형 오피스텔이었다. 이름하야 해오름오피스텔, 나는 그곳을 오르미라고 불렀었다. 정류장에서 오르미까지 꽤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나는 '해'도 이 언덕을 올라가야 해서 해 오름일 거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오르미 속 내 방을 좋아했다. 7년이란 시간을 살아서 정이 든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고민해서 선택한 가구들을 들이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로 가득 채운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룸에 안 맞게 책장을 놓고 모자란 공간에 알맞게 매트리스를 더 작게 제작했다. 오르미 근처 공원에서 나뭇가지를 주워다 가렌다를 만들고는 계절마다 엽서들을 바꿔 달았다. 독립 이래로 냉동실이 딸린 첫 냉장고도 생겼다. 전자레인지를 냉장고 위로 올린 후 전자레인지가 있던 자리에 에어프라이어를 놓았다. 냉장고 위에 전자레인지를 놓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집이 작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에어프라이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냉동실과 에프만 있다면 자취인생은 천하무적이 된다.
우리 오르미는 단점이 참 많은 녀석이었다. 욕실 환풍구로 누군가의 담배냄새가 들어왔고, 환풍구 주변이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창문은 통창인데 이중샤시가 아니어서 겨울철에는 창문을 닫아도 바람이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다이소에서 뽁뽁이를 사 붙여놓아도 소용없었다. 가장 문제는 크기였다. 5.99평, 6평이 채 되지 못한 우리 오르미. 매트리스와 책상과 책장을 배치하고 나니 바닥 장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했다. 나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도 내가 원하는 모든 물건을 집을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데, 가장 먼저 내가 포기한 것은 다름 아닌 김치였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는 것만으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지독한 냄새의 주인공. 방은 작고 냄새는 강력했다. 자기 전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신 뒤 침대에 누우면 냉장고 속에서 피어난 김치 냄새를 침대에 누워서도 맡아야 했다. 봉지로 두 번 싸맨 후 락앤락 통에 넣어두어도, 랩을 칭칭 감아도 냄새는 여전했다. 김치 냄새가 이만큼 강하다는 것을 오르미에 살면서 깨닫게 되었다.
집에 김치가 없다는 건 김치를 못 먹는다는 것이고,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볶은 김치, 삼겹살 기름에 구운 김치, 라면에 김치 등등 김치가 들어간 모든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회사 점심시간에 김치찌개를 사 먹었다. 정말 먹고 싶을 땐 엄마에게 부탁해 내 주먹만큼의 김치를 받아서 먹었다. 겨울에는 봄동을 사서 한 끼 먹을 만큼씩 겉절이를 무쳐 먹기도 했다. 이건 한국사람에게 못할 짓이야, 생각을 하다가도 자기 전까지 냉장고 냄새를 맡으면서 불쾌하게 자기는 싫었다.
원룸에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공간이 작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침대 위에 설치된 에어컨에 주방 기름때가 끼는 것이고, 친구가 놀러 오면 누구 하나는 침대에 앉아야 한다는 뜻이며, 싱크대 옆으로 흘린 세제가 침대로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김치 없이 라면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공공임대주택 빈집 5만 가구 중 절반이 31㎡ 미만 소형주택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또 얼마 전에는 공공임대주택 특별법이 개정되었는데, 본래 있던 1인가구 면적 기준을 폐지하였다고 한다. 그전 1인가구 임대주택의 면적 기준은 35㎡ 이였다. 그 규칙에 반대하는 국민 청원 등의 목소리로 폐지된 것이다. '집'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단순히 먹고 자는 곳이 아님을 깨닫는다. 긴긴 사회생활을 끝낸 후 돌아와 오롯이 내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나처럼 냄새에 예민한 사람도, 나처럼 책이 많아 책장이 필요한 사람도, 나처럼 작지 않은 침대를 두고 싶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만큼의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좋겠다. 야근하고 돌아온 늦은 밤 라면에 김치를 먹고, 편히 누워 잘 수 있다면 그게 행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