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3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당근

씨앗이야말로 빅뱅이 아닐까.

by 미리 Dec 10. 2024
아래로

당근. 주말농장을 운영하면서 가장 먼저 심은 씨앗이 당근이었다. 같은 날 상추와 당귀, 명이나물 같은 모종도 심었고 겨우내 공들여 보관한 씨감자도 심었지만 한 점의 작은 씨앗을 심은 건 당근이 처음이었다. 당근의 씨앗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꽤나 놀랐다. 생각보다 너무 작고 가벼웠으며, 예상하지 못한 생김새 때문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씨앗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깨나 쌀 따위의 껍질 같은 모습, 생명력이라곤 없어 보이는 초라하고 납작한 모습의 씨앗이었다.

다른 씨앗과 다르게 당근의 씨는 햇빛을 보아야 싹이 튼다. 그것을 광발아라고 한다.(고 유튜브에서 배웠다.) 그래서 씨앗을 땅 속 깊숙하게 심기보다는 여름 이불을 덮어주듯 씨앗 위에 얇게 흙을 흩뿌려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물을 줄 때 물길 따라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때로는 새들이 씨앗을 쪼아 먹기도 한다고 한다.


-진짜로 이렇게 심는 거라고?


죽은 점 하나를 땅 위에 떨어뜨리고 온 기분. 이게 어떻게 당근이 된다는 말일까. 기대와 의심으로 물을 준 지 2주가 지나서야 빼꼼, 떡잎이 돋았다. 당근의 떡잎은 얇고 길쭉하며 엄지손가락 한마디도 채 되지 않은 크기로 아주 작았다. 이 작은 이파리들이 저 초봄의 단단한 흙을 뚫고 당근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 내가 이렇게 뿌렸구나.


떡잎들의 자리를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뿌린 씨앗의 자리를 알게 되었다. 일렬로 반듯하게 뿌렸다고 생각했던 씨앗들이 삐뚤빼뚤하게 새 잎을 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당연한 이치를 다시금 깨달았다. 같이 심은 씨감자는 여전히 땅 속에서 잠자고 있을 때, 처음으로 초록잎을 낸 당근들이 너무 기특했다. 내가 직접 뿌린 씨앗의 발아라니, 마치 아이를 가진 기분으로 그 작고 얇은 초록잎들을 무척이나 예뻐했다. (물론 아이를 가져본 적은 없다. 아마도 당근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테지)


그로부터 2주 뒤. 떡잎 다음의 잎이 자랐다. 작고 얇은 떡잎과는 다르게 비로소 아주 건강하고 화려한 잎을 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잎이라 부르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틀렸다. 본잎까지는 봐야 될성싶은 당근을 알 수 있다.


본잎이 세장정도 자랐을 때쯤 확인해 보면 어디는 듬성하게 잎이 자랐고, 어디는 빽빽이 잎을 내었다. 그건 씨가 몰려서 뿌려졌다는 걸 의미했다. 초보농사꾼이 씨앗을 잘 뿌리지 못했던 거다. 그러면 아까운 마음을 접어두고 솎아주기를 해야 한다. 몰려있는 것들 중에 가장 연약한 아이들을 잡아 뽑아주어야 한다. 당근도 무한 경쟁사회에 놓였구나, 도태되는 연약한 아이들에게 참 미안했다. 10센티미터 남짓의 당근잎을 잡아 뽑았다. 그 작고 연약한 아이에게도 당근이라고 불릴만한 작은 뿌리들이 달려있었다. 작은 본잎에서는 당근 냄새가 화려하게 풍겼다. 당근잎에서도 당근의 냄새가 난다니, 이렇게나 선명한 냄새가 난다니, 충격이었다. 그것도 1달만의 일이었다. 작은 점에서 당근이라 불릴 수 있을 때까지 고작 1달이 걸린 것이다. 나는 그 작은 당근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데려왔다. 귀엽고 미안한 마음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먹어주기로 했다. 이상한 마음이라 느낄 수 있지만 먹어주는 것이 당근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잎들도 버리지 않고 부침반죽을 무쳐 부침개를 해 먹었다.(당근 잎에는 베타카로틴이 풍부하다고, 역시 유튜브에서 배웠다.) 작은 당근들은 깨끗이 씻어 생으로도 씹어 먹었고, 얇은 아이들을 더 얇게 채 썰어 김밥에도 넣어 먹었다. 당근의 잎을 떼고, 당근을 씻고, 당근을 자르는 내내 나의 주방에는 당근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두 번의 솎아주기에서 생존한 당근들은 엄청난 속도로 자랐다. 잎들은 50cm 정도로 훌쩍 자랐고, 당근이 커지면서 단단한 흙이 터지듯 갈라지고 그 사이로 당근의 주황빛이 보였다. 나는 당근이 자라는 그 모든 순간, 매일같이 놀랐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작은 씨앗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뿌리와 잎들을 상상했다. 팡, 하고 터지듯이 끊이지 않고 커지는 생명. 아주 작은 한 점에서 폭발하는 어떤 힘. 이것이야 말로 빅뱅이 아닐까. 그게 무엇이길래 아주 오래된 씨앗도 폭발하듯 잎과 뿌리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그 작은 점 하나에서 이토록 당근냄새를 풍기는 잎을 내는 건지, 당근의 주황을 키워내는 건지 정말 알 수 없다. 세상에는 모르는 것투성이고, 곳곳에 당근냄새가 가득하다.

화요일 연재
이전 18화 김치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