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 자리에 놓여 있는 붙박이장 같고, 잘 개인 이불같이 정적이고 규칙적으로 사셨던 분.
그 이면에는 기이한 면모가 없지 않았다.
평생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었고, 어디 심하게 부딪히거나 넘어져도 골절 한 번 입지 않았던 아버지.
술, 담배를 일찌감치 끊어서 설탕류를 평생 입에 달고 사셨는데, 당뇨가 없었던 아버지.
6.25 전쟁에 나가서 입은 총상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았지만, 타고나길 무쇠처럼 강골이었던 아버지.
강인한 신체를 과시하려고 아픈 것도 숨기고 센 척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아버지는 100세를 몇 년 앞두고 뇌가 먼저 고장 나 버렸다.
다른 신체 부위와 달리 뇌는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센 척할 수 없는, 아버지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는 오직 내 걱정뿐이었다
아버지는 나흘간 음식은 물론 물조차 거부하셨다.
우리에 갇힌 짐승이 되어 폭력적인 기운이 흉흉했고 벗은 몸으로 부끄러움조차 몰랐다.
마치 당신의 몸에서 생명을 도려내려는 듯, 어딘가 비장한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가 죽으시려는구나.
나는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었다.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과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으니 저러다 잘못될까 싶어 겁났다.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려고, 발에 차여가며 겨우 옷을 입혀서 구급차를 불렀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 먼 지역에 사는 가족들도 속속 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기본적인 검사조차도 쉽지 않았다. CT를 찍으려는데, 온몸으로 발버둥 치니 의료진,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야 했다. 아버지를 간신히 제압해서 CT를 찍었다.
의사는 뇌 CT 상에서 심각한 뇌출혈 흔적을 짚어주며, 대강 소견을 말했다. 오래전부터 뇌경색을 앓았던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더 자세한 건 MRI 찍어 봐야 안다는데, 아버지가 협조해 주지 않으니 불가능했다.
입원 절차를 밟았다. 6인실이 없어 1인실에 모셨다.
아버지는 제압이 안되어 수액을 놓기가 힘들었다. 발등 혈관에 겨우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지만, 콧줄 삽관에 더 어려움을 겪는다. 전공의로 보이는 의사는 삽관 시술에 계속 실패했다. 가늘고 긴 호수를 코에서 식도 밑으로 밀어 넣는데, 두레질하듯 그 짓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아버지는 여지없이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부릅뜬 눈, 벌겋게 피가 몰린 얼굴,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이 병실 안을 조각조각 찢어 놓았다.
지켜보는 나와 가족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회진 온 신경과 주치의는 아버지의 기억상실과 망상, 폭력적 행동, 섬망 증세는 뇌경색에서 비롯된 것이지, 치매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치매가 아닌 것 같지 않지만, 의사의 치료 계획은 거시적이고 낙관적이었다.
하루하루 피 말리는 가족 입장에서는 무엇하나 뚜렷한 게 보이지 않으니 답답함만 더했다.
6인실 자리가 났지만, 옮겨 주지 않았다. 난동 부리게 되면, 다른 환자에게 피해를 준다고.
아버지는 조용한 1인실 병동에서 가장 시끄러운 환자였다. 당신 몸에 손 만 대면 사납게 어르릉 거렸다. 의료진에게도 소리 지르고 침 뱉고 힘껏 주먹과 발차기를 날렸다.
어렵게 집어넣은 콧줄을 쉽게 빼버리자 양팔을 침대 지지대에 단단히 묶어야 했다.
새 시트로 갈려면 간호사 서너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아버지는 나흘간 물 한 방울 드시지 않았는데 기운이 장사였다.
아버지의 그 불안한 심기를 다독일 여력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콧줄을 빼지 못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조바심만 쳤다. 강제적인 물리력을 동원하는 것 외엔 할 도리가 없었다. 이때부터 인간의 기본 존엄성이 사라졌다.
병원에서 아버지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바이탈 체크와 삽관을 통해 음식과 약을 넣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치료는 없었다.
약물치료나 수술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고 하니, 90대 연세에 불가능한 것만 보였다.
1인실 병원비와 간병비 등, 소모전밖에 없었다. 병세에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힘겹기만 했다.
간병인 구하기도 어려웠다.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못하겠다는 거절한 간병인도 있었다. 힘든 환자라는 소문이 돌았는지 다른 업체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코로나 시국 (2021년)이라 간병인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와 번갈아 가며 아버지 병상을 지켰다.
우리를 지켜보던 간호부장이 직접 나서서 간병인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 사정이 안타까웠다기보다 엄마가 간호사들을 수시로 호출해 대서 힘들게 했다. 가뜩이나 격무에 시달리는 간호사들에게 잡다한 일까지 더해주었으니까.
내가 간호사 좀 그만 부르라고 하면 엄마는 1인실 사용료에 다 포함된 것 아니냐고 낭창하게 말했다.
거의 혼절해 있다시피 넋 나가 있던 엄마가 유일하게 내보이는 감정은, 갑질이었다.
간병인은 코로나 검사를 받고 오겠다며 며칠 더 지체했다.
그 전날, 아버지는 큰 볼일을 보게 된다. 엄마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손도 대지 못했다. 엄마가 간호사를 호출하려고 들자,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루만 더 참으시지. 나는 울고만 싶었다. 그 한 번이 계속될 것 같아 암울하고 절망스러웠다.
'아버지, 이때껏 못했던 효도 이걸로 갚는 거예요.'
나는 한 번 기저귀를 갈아드린 걸 억울해하고 생색냈다.
일주일 만에 배설하는 거라 양도 어마했다. 본인도 시원했던지, 그때만은 얌전해졌다.
나는 서툰 손길로 기저귀를 갈다가 시트를 더럽혀 놓고 말았다. 방금 간호사들이 시트를 통째로 갈고 간 뒤였다.
수시로 콧줄을 빼려고 발버둥 치는 아버지를 제압하며 새 시트로 바꾸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와 간호사 세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두 명은 아버지를 붙들고, 두 명은 새 시트로 바꾸었다. 그 일이 있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시트를 더럽혀 놓았다. 다시 새 시트로 갈아야 한다는 게 더 암담했다.
시트 위에 까는 방수 매트가 있다는 건 간병인이 오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 입원 일주차가 넘자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시원하게 큰 볼일을 본 그날만은 얌전히 누워서 무슨 말인가 중얼거렸다.
침대 머리맡에 쪼그려앉아 들어보니, 돈을 헤아리는 듯했다.
아버지의 정신은 먼 과거의 시간대로 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닥치는 대로 일했던 청년 시절로 간 걸까.
아버지는 쇠 다루는 기술을 배워 자수성가했다고 들었다.
1950년대 GNP 57불 시절, 돈다발을 헤아리기도 바쁜 아버지의 사업장은 호황기를 누렸다. 손 기술이나 발품으로 얻었던 게 많았던 아날로그 시대가 아버지에게는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대가족의 소년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백, 천, 만.... 백, 천, 만....
아버지는 밤이 새도록 돈을 헤아렸다. 얼마나 좋았으면 리듬까지 탔다.
별을 헤는 밤이 아니라 지폐를 헤는 밤이라고 할까.
나에게는 기약 없는 돌봄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첫 계약작이라도 무사히 끝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오직 나는 내 걱정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