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 목말라 휴게공간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렸던 나.하루 한번 치료실로 가는 시간이 즐거웠고, 혈압 체크하러 매일 병실을 찾는 간호사가 반가웠다. 한마디라도 더 나누려고 괜한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주로 그날의 날씨라든지 몸 상태라든지, 대개는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었다.그들은 참으로 싫었겠지만 그 짧은 대화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소통을 좋아한다 했지만 사실 나는 말이 없는 편이다. 어쩌다 만나는 동네 엄마들 모임에서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정해져 있다. 나는 항상 듣는 쪽이다. 하지만 소통과 말하는 횟수는 상관관계가 없지 않을까?
말을 하지 않는다 해서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니까. 바라봄, 끄덕거림, 간단한 추임새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소통이라 생각한다.
대학 시절 친구가 우리 집에 처음 놀러 갔었을 때 이야기를 종종 한다. 20년이 훌쩍 지난 일인데도 기억이 생생하단다. 그날이 친구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조부모와 함께 부모님, 두 동생까지 삼대가 어우러져 살았던 친구는 늘 시끌벅적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우리 집이 무슨 절간처럼 느껴졌단다. 조용한 공기와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있던 나의 어머니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누가 그 어머니의 딸 아니랄까, 지금 내 모습이 그와 똑 닮았다. (이건 차차 얘기하고...)
나에게 익숙한 그 절간 같은 공기가 여기 303호에 만연한데, 도통 적응을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 마냥 병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닫았다 했다.
"미쌍이님, 어디 불편한 데 있으세요?"
"아, 아뇨. 저 조금 답답해서...."
"그 병실이 워낙 조용하죠? 내일 두 분 퇴원하시면 혼자 계시겠네요."
"예에? 퇴원이요?"
"네. 다리 다치신 분은 직장 때문에 가셔야 하고, 미쌍이님 옆에 그분은 아기가 너무 어려서 병원에 더는 못 계신대요."
나의 소통이 부족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옆 침대여자에 대해 아는 거라곤'환자가 있다'는 것뿐.열린 커튼 틈으로 얼핏 빈침대가 몇 번 보이긴했지만 거의 비어있었다.
같은 병실을 쓴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알 이유도 없고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그게 당연한 거였다.
그들에대한 정보를 얻고자 간호사들과 소통했다면 그건 어쩌면 사생활 침해가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여간 조심스러운 접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절간 같은공간에새어 나오는 병실사람들의목소리는 그런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지 않도록상상할 '거리'를 주었다.어느 정도는 그들의 삶과 가깝지 않을까 싶다.
다리 다친 아가씨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고객님. 물건은 바로 발송해 드릴 거고요.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여자는 전화상담원이 되어 불만 고객을 응대했다. 솔- 톤의 목소리에는 친철함과 노련함이 묻어 나왔고, 어떤 불만이든 능숙하게 다뤘다. 그녀는 그날 쌓인 스트레스를 야식 양념 치킨으로 푸는 것 같았다. 바스락대며 종이봉투가 열리면 소리와 함께 달큰한 냄새가 내 침대까지 넘어왔다. 아, 맥주를마시지 못하는 것에내가 다 안타까울지경이다.
얼굴도 못 본 옆 침대는 아기 엄마라는 사실만 남기고 떠났다.거의 외출증을 끊고 아기에게 가 있었기에 빈 침대였던 거다. 엄마 껌딱지 시기의 아기들은 한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는데, 매일 아픈 몸을 끌고 집으로 다녀오는 마음이 어땠을까? 집으로 향할 땐 몸이 무겁고, 병원으로 향할 땐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아기 엄마는 퇴원하는 날 아침 식사가 배식되기도 전에 침대를 떠났다. 배식원이 식판을 들고 커튼을 열었을 땐, 이불이 젖혀진 빈 침대 위에소리 없는 티브이만 움직이고 있었다. 배식원이 리모컨버튼을 누르자, 화면 속 춤추던만화 캐릭터가 윙크하며 사라졌다.
'아, 저 커튼 안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건 이유가 있었구나....'
그들의 떠남으로 나의 상상은 마무리되었고, 새로운 누군가 올 때까지홀로 303호의 온기를채워갔다.
빈 병실에 혼자 있으니 아이들이 더 보고 싶었다. 괜스레 이어폰을 꽂지 않고, 스피커폰을 켠 채로 영상통화를 했다. 누군가 나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이가 있다면 재밌는 이야기 '거리'를 던져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복도 어딘가 어슬렁거리는 심심한 하이에나가 있을지 모르니까.
소통과 사생활 침해의 경계 그 어디쯤에서.
이 이야기는 당최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몇 번이고 연재북을 접을까 고민하다가 시작을 하였으니 끝장은 보자는 마음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점점 나아질 날이 오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