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이라는 10개월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사실 우리 둘 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 3주년이 되어가는 만 서른 다섯의 동갑내기 부부이지만 아기 생각이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를 반반씩 닮은 새로운 멤버가 추가된다면 그것 또한 꽤 재밌는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슬슬 생각해보자 하며 일단 그동안 복용해왔던 피임약을 끊었다. 복권에 당첨되는 첫걸음은 복권부터 사는 것이니까. 피임약을 끊기로 한 날 인터넷으로 후기가 좋은 엽산을 찾아 주문했다. 엽산은 미리 먹기 시작하는 게 좋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 들어서다. '어차피 바로 임신이 되진 않을 테니'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 그대로 임신이 되었다.
이 기분을 묘사하자면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간 꼭 사야지’ 하고 장바구니에 소중하게 넣어둔 아이템이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모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주문 완료가 되어 이미 배송 중인 느낌이다. 게다가 주문 취소나 반품, 교환 불가인데 선 주문 후 제작이라 꽤 오래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단다. 자그마치 열 달. 임신 기간으로 생각하면 꽤 오랜 기간인 것 같은데 내년 4월이면 우리 집에 꼬물거리는 아기 하나가 누워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결코 오랜 기간이 아니다.
아기의 태명이 ‘바다’라고 하면 모두가 이렇게 말한다.
“둘이 바다에서 만나서 그렇게 지었구나!”
사실 바다 말고는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다. 크루즈 승무원이었던 나의 20대를 가득 채워준 바다. 지금도 단잠을 잘 땐 꿈에 바다가 나오곤 한다. 행복이 무슨 색깔이냐고 묻는다면 푸른 바다 빛을 떠올릴 것이다. 그 바다가 그리워서 내가 사랑했던 반짝이는 윤슬을 담은 표기식 작가의 A1 사이즈 포스터를 거실 한가운데에 세워놓기까지 했으니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을 맞이한 순간, 바다를 품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7년간 항해를 해오며 만난 바다의 표정은 다양했다. 거울처럼 잔잔한 바다, 별을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는 바다, 한없이 새파란 바다, 한껏 찌푸리고 으르렁 거리는 바다, 배 표면을 부술 것처럼 몰아치는 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한 밤바다. 임신 초기에 미식거리고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 때면 ‘이거 괜히 태명을 바다라고 지어서 멀미를 하는 건가’ 생각한 적도 있지만 다행히도 내 안의 바다는 대체로 고요해서 큰 풍랑 없이 12주째 순항 중이다.
그 시절, 이른 아침 오픈 데크를 걸으며 홀로 바다의 냄새를 들이켜던 시간, 라운지에서 나의 다정한 게스트들과 해지는 바다를 다 같이 바라보는 순간이 참 좋았다. 이제는 내 안의 바다에게 말을 건다.
"앞으로의 항해,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