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환은 연구실 한쪽에 아이스박스를 두고 몇 개의 콜을 처리하는 동안 그것의 존재를 완전히 잊었다. 그러다 퇴근할 때가 돼서야 다시금 그것을 떠올렸다. 그것이 생물이라는 사실이 그 존재를 완전히 잊지 못하게 했다. 살아있는 것은 죽기 마련이고, 백종환에게 죽음이란 부패를 의미했다. 그 이상의 의미를 찾는 건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대체 죽음 이후에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사후가 정말 존재한다면 왜들 그렇게 살려고 아등바등 기를 쓸까? 무엇이 두려워서? 사람의 심부를 가르고 다시 덮을 때마다 생의 뒤편엔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은 더해졌다. 그 뒤엔 완전한 무(無)의 영역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백종환은 윤하나의 병실 한편 작은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성경을 떠올렸고 윤하나의 신앙이 통증에 의한 공포로부터 발원했을 거라고 멋대로 추측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대물림된 통증의 역사. 핏속에 각인된 죽음의 공포와 무력감이 신을 부르고 끝내 순종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허나… 그들의 표현에 따라 전능에 가까운 건, 죽은 몸에 다시 피를 돌게 한 건 역시 과학이 아닌가? 백종환은 불확실한 믿음과 소망에 기원한 종교는 복권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Yes. 실존하는가? Yes. 그렇다면 에크모야말로 신이라 불려야 마땅했다.
백종환은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어 보았다. 연구실에서 생물이 썩어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백종환은 불결을 견디지 못했다. 깔끔하다고 정평이 난 그의 수술 역시 불결한 것―종양, 고름, 혈전 같은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온전함에 대한 거의 병적일 정도의 집착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코끝에 뭉근한 물비린내가 스쳤다. 백종환은 행여 비린내가 몸에 달라붙을세라 머리를 살짝 뒤로 젖혔다. 그 안에는 30c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자라가 머리를 껍질에 숨긴 채 바짝 웅크리고 있었다.
아하. 자기랑 꼭 닮은 걸 주고 가셨군.
전역 후 보신을 해준답시고 모친이 달여온 용봉탕을 먹고 밤낮으로 신트림과 구역질에 시달렸던 그는 오래 잊고 있던 불쾌감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구겼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창문을 열고 박스째 집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자라라니. 그것은 차라리 삶을 향한 괴이한 집착의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급격한 피로감에 백종환은 눈 앞머리를 꾸욱 눌렀다. 그는 서성이며 박스 처리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내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엔 늘 두엇의 레지던트들이 모여 있었다. 백종환이 휴게실에 들어서자 늘어져 있던 레지던트들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백종환은 테이블 위에 박스를 내려놨다.
제일 필요한 놈이 가져가라.
그 말을 남기고 백종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털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백종환은 손을 코에 가져다 대고 킁킁거린 뒤 개수대에서 오래도록 손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