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환
가끔 그런 이들이 있다. 마음이랍시고 처치 곤란한 현물을 덥석 안겨주는 이들이. 그들이 내미는 것들은 대체로 상대의 필요는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 얼마나 무례하고 이기적인지. 그들은 그러한 행위가 때에 따라서는 폭력이 될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거겠지. 그들에게 상식이란 뭘까. 백종환은 아이스박스를 든 채 솟구치는 짜증을 애써 억눌렀다. 와중에 아이스박스는 꽤 묵직하기까지 했다.
요즘 기술이 좋아서 자연산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에크모 시술을 한 여자의 남편. 그 덩치 크고 거무죽죽한 남자는 끝내 무례했다.
에크모, 그놈의 에크모. 기술이 너무 좋아졌어.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급성심근경색의 초기 사망률은 40%를 웃돌았다. 병원에 오지도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3분의 1정도였는데 에크모 도입 이후 생존율이 60%까지 높아졌다. 폐와 심장이 망가진 환자들이 에크모를 마지막 생명줄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에크모는 과학과 기술의 산물이었으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운 좋게 생의 문고리를 잡은 이들은 백종환의 그림자만 보여도 눈가가 젖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떤 보호자들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흐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백종환은 자신의 표정을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입을 가리곤 했으나, 언젠가부터는 그런 노력도 하지 않게 되었다. 환자들은 구원에 취해 엎드릴 신상이 필요할 뿐이었다. 신상의 표정 따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발치에 엎드린 등이 쌓일 때마다 그는 다른 감정보다 고귀하다고 추앙되는 감정들. 이를테면 이타심, 자애심조차 짜증이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타성에 젖을 수 있는 영역의 감정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감정 따위. 보이지 않는 것들은 과대평가되기 마련이니까. 실체 없음과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운 것들을 백종환은 믿지 않았다.
결국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 인간의 기대수명이라는 건 90세가 채 안 된다. 건강수명은 65세 정도. 그러니까 일생의 약 20년 정도는 질병으로 고생하다 간다는 얘기인 셈이다. 거기다 암,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희귀난치성 질환은 한국인 사망원인의 48%에 육박하고… 특히 심근경색은 재발 위험이 크다. 절반 이상의 환자가 빠르면 6개월 안에 심장 때문에 다시 백종환을 찾아왔다. 가족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탈모가 유전인 것처럼, 약한 심장도 유전된다. 백종환은 얼마간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시간을 벌어줄 때마다 이런 걸 받게 된다면 조만간 창고를 하나 임대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