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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Mar 31. 2017

센토사, 아시아의 남쪽 끝에서

SINGapore, 널 노래하던 순간 - 네 번째,  여행자의 버릇

내일은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때 내가 해변에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

마리나 베이, 싱가포르

 늦은 오후 한바탕 내린 소나기에 풀이 죽어버린 건지,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의 나이트 쇼를 보기 위해 마리나 베이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도시는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빛이 옅어지기만 할 뿐, 붉거나 노란 혹은 주황빛의 깜짝쇼는 이 날 없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맞은 두 번째 밤, 유독 밤이 달콤한 이 땅에서 이제 남은 밤이 단 하나뿐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던 저는 인공 정원의 화려한 쇼를 감상하며 마지막 밤을 계획했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는 내내 계속된 고민은 떠나기 전 친구가 일러준 이름을 떠올리며 끝이 났습니다. 마치 세상 제일의 낙원을 소개하듯 신난 표정으로 일러준 섬의 이름은 센토사. 섬나라 싱가포르의 남쪽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센토사 섬으로 향하는 케이블 카 안에서

'그래, 혼자니까 부릴 수 있는 어리광이지'


 MRT 하버 프런트(HarbourFront) 역 앞에 있는 편한 케이블카 정류장을 포기하고 기어이 버스를 갈아타 페이버(Faber) 산 꼭대기 전망대까지 걸어갔습니다. 같은 가격에 센토사 섬까지 더 오랫동안 케이블카를 타고 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정오를 막 지난 시각, 찌는 듯한 오후의 절정에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다시 오르막 길을 발 끝으로 잡아당기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리고 셔츠는 흠뻑 젖어 듣에 찰싹 붙었습니다. 아마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그가 더없이 가까운 벗이었더라도 무척 미안했을 거예요. 정말이지, 혼자여서 다행이었습니다.


 30불이 넘는 사치, 센토사 섬 왕복 티켓을 들고 동그란 케이블 카에 혼자 오르는데, 지난 한 시간의 고생들에 혀를 끌끌 차게 되면서도 기분만은 어찌나 좋던지요. 케이블카 오른쪽에 난 작은 창에 고개를 처박은 채 하버프런트를 지나 센토사 섬으로 향했습니다. 반쯤 창 밖으로 나온 코에 싱가포르의 오후와 어울리지 않는 시원한 바람이 스쳤습니다.


센토사 섬, 싱가포르 입구



실로소, 너는 낭만.

실로소 해변, 싱가포르

 케이블 카에 내려 그 길로 쭉 걸어오는 길에 실로소 해변이 있었습니다. 센토사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실로소 해변은 이 섬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사랑받는 해변입니다. 파도가 잔잔한 바다, 백사장을 따라 이어지는 다양한 먹거리와 마실거리 등 휴양을 위해 센토사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것들이 가득해서 센토사를 찾는 이들 중 실로소를 지나치는 이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실로소 해변, 싱가포르

 제법 긴 실로소 해변을 걷는 동안 청바지에 셔츠 차림인 제 모습이 수영복을 입고 백사장 위에 눕거나 그 위를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드레스 코드도 맞추지 못한 불청객 티를 조금이라도 덜 내고자 운동화를 벗어 들고 모래 위를 걷다가, 결국 주저앉아 해변의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그림 같은 하늘을 올려보는 동안에는 이 섬의 입장료는 혹시 이 날씨에 대한 대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고요.


 아이의 미소와 연인들의 손짓, 신사의 퉁퉁한 등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실로소 해변은 무척이나 낭만적인 곳이었습니다. 마리나 베이 샌즈를 보면서도 무덤덤했던 제가 '사랑하는 이가 생긴다면'으로 시작하는 고리타분한 다짐을 하게 된 것을 보면 말이죠. 몇몇 장면에서는 무척 샘이 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해변의 낭만을 즐겼습니다. 노을은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요.



팔라완, 너는 여유.

팔라완 해변, 싱가포르

 실로소 해변이 화려한 휴양지라면, 조금 떨어진 섬 남쪽의 팔라완 해변은 한적한 유원지 느낌이 나더군요. 화려한 레스토랑과 바가 드물고, 파라솔도 듬성듬성 박혀 있어서 그래 보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옷차림 역시, 실로소 해변은 멋진 수영복을 뽐내는 이들이 많았던 데 반해 팔라완 해변에서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물놀이를 즐기는 또래 친구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습니다. 청바지를 입은 제 옷차림이 이 곳에서는 덜 머쓱하다는 이유로, 저는 이 곳을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내가 사는 대륙의 가장 남쪽 지점

 팔라완 해변이 특별한 이유는 이 해변이 품은 특별한 점에 있습니다. 해변 중간쯤에 있는 좁은 폭의 다리를 건너면 아시아 대륙의 최남단 지점에 도달할 수 있거든요. 사실 이 해변은 팔라완이라는 이름보다 이 아시아 최남단 전망대로 더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맞은편에서 오는 이를 위해 잠시 난간에 기대 공간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좁은 다리는 이 특별한 장소에 가기 위한 이들로 쉴 새 없이 출렁댑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꽤나 그럴듯한 전망대도 제법 붐비고요.


아시아 최남단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이곳이 내가 사는 대륙의 가장 남쪽 지점. 그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는 잔뜩 떠 있는 선박들 탓에 기대했던 낭만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노을 하나를 위해 이 섬을 찾은 제게는 예상 밖의 횡재였습니다.



딱, 하루가 이 정도면 괜찮다 느낄 때쯤,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챈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망대 꼭대기로 달려 올라가야 할 만큼 갑자기 쏟아진, 그리고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제법 큰 소나기였습니다. 비가 아침부터 달군 하루를 식히는 동안 저는 나무 난간에 기대 이번 여행 중 가장 긴 휴식을 즐겼습니다. 어찌 보면 이 작은 섬에 갇힌 셈인데도, 어쩐 일인지 하나도 조바심은 나지 않았습니다.


'언젠간 그치겠지, 이대로 내일쯤 풀려나도 좋고.'


그 섬의 여유는 제법 전염성이 있더군요.



마지막, 어쩌면 오지 않을 그댈 기다리며

팔라완 해변, 싱가포르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비는 그쳤지만 더 이상 밝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후가 가장 뜨거운 시간에 시작된 센토사에서의 하루가 조금씩 저물고, 사람들은 하나 둘 해변을 빠져나가는 시간, 하지만 섬에 온 이유가 아직 남은 저는 백사장 안쪽 콘크리트 계단에 앉아 노을을 기다렸습니다. 점점 흐려지는 하늘이 어쩌면 오늘도 기다렸던 노을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지만, 서울에서부터 반복해서 듣고 있는 슬픈 영화의 OST와 아직 빈 곳이 대부분인 수첩을 채우며 보내는 시간이 그런대로 즐거워 다행이었습니다. 자칫 이번 여행 가장 큰 낭비일 수도 있었던 그 시간 동안 이번 여행의 가장 많은 이야기들을 기록해 둘 수 있었습니다.


트래블라인 앱에 팔라완 비치 소개를 적기도 하고요.

 한바탕 수첩에 섬의 온도와 색, 감정들을 적어낸 후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이 꽤 어두워져 있었던 덕에 오른편에 보이는 숲 너머로 옅은 주황색이 비치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기다렸던 소식에 벌떡 일어나 노을이 새어 나오는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익숙한 해변, 실로소가 펼쳐지는 순간, '아아-'하고 감탄이 나왔습니다.


실로소 해변의 노을

 싱가포르에서 제가 본 처음이자 마지막 노을이 아시아의 최남단 풍경 위로 펼쳐지고 있었고, 운 좋게도 저는 실로소 해변에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 서서 노을을 맞이하고 있었고 제가 도착한 후에도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선명한 주황색의 노을 위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만든 장면들은 이 여행의 절정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붉은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센토사 섬을 빠져나와 케이블카를 탔습니다. 하지만 페이버 산 정류장 대신 가까운 하버프런트 역에서 내려 MRT를 타고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멋진 해변에서 그림 같은 노을을 본 것으로 오늘 하루가, 아니 어쩌면 이번 여행이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꿈꾸고, 기다리다 결국 달려가서 만끽했던 하루. 여행은 종종 이렇게 성취감으로 완성되기도 합니다.


팔라완 해변, 싱가포르




싱가포르 X 브런치 트래블 패스 그리고 금요일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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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트는 싱가포르관광청으로부터 일부 경비를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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