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요일 Mar 26. 2017

싱가포르,
당신의 밤을 사랑하게 됐어

SINGapore, 널 노래하던 순간 - 첫 번째, 여행자의 밤.

승객 여러분, 싱가포르 창이 공항으로 향하는
싱가포르 항공 비행기가 곧 이륙합니다.

 아침 아홉 시, 작은 모니터 화면과 그 못지않게 답답한 창문을 번갈아 보며 이륙을 기다립니다. 발을 쭉 뻗을 수 있는 비상구 쪽 좌석에 앉아 있으니 유난히 순조로웠던 이 여행의 준비 과정들이 절로 떠오릅니다. 이미 봄이 온 것처럼 따끔거렸던 어제 오후의 햇살, 내내 뒤척였지만 가벼운 몸, 오랜만에 꺼내 입은 외투 주머니 속 반가운 USB 메모리까지. 게다가 이번 여행을 위해 챙긴 새 수첩의 표지는 반들반들 촉감이 좋아 연신 들어다 놓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상관없는 이 모든 일들이 한 덩어리처럼 뭉쳐져 심장 언저리를 간질이는 듯한 기분을 저는 여행을 떠나는 날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동안 느끼곤 합니다. 생각해보니 그 둘은 제법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아요.


 가방에서 ‘Splendid Singapore’라는 제목의 얇은 가이드 북을 꺼냈습니다. 언제나처럼 도착해서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가고 어떻게 먹어야 할지 정하지 않았거든요. 준비한 여행에선 준비한 만큼 얻게 되지만, 준비 없이 떠난 여행에선 종종 상상 외의 값진 것을 낚게 된다며 핑계를 대지만, 실은 이런 게으른 여행에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행히 싱가포르까지는 비행시간이 넉넉합니다. 여섯 시간 오십 분간 하늘 위에서 낯선 도시를 상상하고 설렘을 만끽하는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일정입니다.


 이륙을 십여 분 앞두고 캐비닛 여닫는 소리와 승무원의 목소리, 사람들의 움직임들로 무척 분주한 기내, 기내식 메뉴가 적힌 작은 책자를 훑던 눈에 익숙한 글자가 띄었습니다.


싱가포르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을 성큼 뛰어넘은 여행

 떠나는 날 아침, 셔츠 위에 얇은 스웨터 한 장을 겹쳐 입은 옷차림을 본 어머니는 호통을 치셨습니다. 날짜는 이미 3월이었지만, 계절은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었거든요.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엔 새벽 찬 공기가 뱃속까지 들어오지 않도록 연신 숨을 후후 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섯 시간 오십 분의 비행을 마치고 창이 공항의 복도를 걷는 동안 계절은 어느새 여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지하철 MRT를 타고 번화가 오차드 로드(Orchard Road)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후, 흠뻑 젖은 옷부터 벗어던지고 샤워를 해야 할 정도로 무더웠죠. 거리의 풍경이며 사람들의 생김새보다 강렬했던 더위는 흡사 ‘다른 계절로의 여행’ 혹은 ‘이른 여름 마중’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싱가포르의 첫인상은 무척 뜨겁게 남아 있습니다.


 얇은 티셔츠를 입고 배낭에 짐을 간단히 챙긴 뒤 서둘러 숙소를 나왔습니다. 짐 정리는 밤으로 미룬 채. 아무래도 곧 해가 질 것 같았거든요.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번화가 중 하나이자 쇼핑 천국으로 알려진 오차드 로드(Orchard Road)의 인파를 뚫고 클라크 퀘이(Clarke Quay)의 유명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새삼 싱가포르 한복판에 있다는 즐거움에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혼밥이지만 호기롭게 칠리크랩 한 마리를 주문한 것이 후회되지 않습니다.


 간간히 강변 풍경을 감상하며 식사를 하는 동안 도시에는 어둠이 내렸습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꽤나 조바심이 났을 법도 한데, 그 날만큼은 다급함보단 설렘이 훨씬 컸습니다. 마치 근사한 저녁 약속을 앞둔 사람처럼 말이죠. 호되게 비싼 저녁 식사값을 지불하고, 구글맵을 따라 마리나 베이까지 걷는 동안 그 두근거림은 조금씩 커졌고, 마침내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멀라이언(Merlion)을 발견했을 때, 무언가 가슴속에서 ‘팍’하고 터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 이 도시의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쭉 기다려 온 장면을 만난 기쁨 그리고 지난 여행에서 희미하게 보였던 것들이 선명해지는 환희 비슷한 것이었달까요.



마리나 베이, 그리고 싱가포르의 밤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Marina bay)의 야경

 토요일 밤, 멀라이언 파크(Merlion park)에는 설 자리조차 마땅치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모여 있었습니다. 멀라이언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짧은 전망대의 난간에도 발 디딜 틈이 보이지 않았고, 카메라 셔터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사진 속에서 보았던, 그리고 오늘 아침 가이드 북을 보며 상상했던 마리나 베이의 야경에 이끌려 공원 한편, 빼곡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은 후에야 제가 오기 전부터 공원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조명을 받은 멀라이언이 매 초마다 다른 색을 갈아입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삼각대를 펴고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그 모든 소리가 한 데 얽혀 마치 오후처럼 시끌벅적했는데, 그중 한 여성의 목소리가 한 말이 유독 또렷하게 들려 아직도 그 억양이며 떨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 도시의 야경은 내가 보았던 어떤 곳보다 아름다워.’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는 저도 그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일 만큼, 마리나 베이의 야경은 화려하고 또 극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잠시도 쉬지 않고 반짝거렸습니다. 아직 싱가포르의 아침 그리고 오후를 만나기도 전이었지만, 그 야경 앞에서 저는 여행을 준비하며 보았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삼각대 위에 매달린 카메라가 셔터를 열어 사진을 담는 동안, 수첩을 꺼내 소감을 적었습니다. ‘낮보다 아름다운 밤’ 그리고 ‘식지 않는 도시의 여운’, 두 개의 수식어 모두 맞춤옷처럼 잘 어울린다고.


 그 날 제가 멀라이언 파크에 머무는 동안 총 세 번의 레이저 쇼가 펼쳐졌습니다. 여덟 시와 아홉 시 반, 열한 시. 마리나 베이는 물론 싱가포르의 상징과도 같은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꼭대기에서 나오는 화려한 레이저에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고, 종종 이 야경과 어울리지 않는 적막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십 오분 가량의 짧은 공연히 끝나면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한바탕 빠져나가고, 다음 순서에 맞춰 다시 들이닥치곤 했는데, 세 번의 공연과 그 풍경을 빠짐없이 본 저는 아무래도 그 날 마리나 베이에서 가장 정신 못 차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의 선율

싱가포르,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의 밤

 여행 둘째 날, 싱가포르에서 처음 맞는 아침과 오후를 다문화 마을에서 보냈습니다. 골목 몇 개를 사이에 두고 펼쳐진 풍경이 마치 몇 걸음으로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던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젖은 셔츠가 마를 틈 없을 만큼 뜨거운 오후를 보내는 동안 마음 한 켠으론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지난밤 저를 사로잡은 마리나 베이의 야경을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했지만, 해가 지면 시작될 또 다른 도시의 하루에 대한 기대 역시 컸달까요. 아침부터 달궈진 하루가 오후 네 시, 한바탕 소나기를 쏟아 내며 쉼표를 찍을 때, 인도 거리 끝자락의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며 싱가포르에서의 두 번째 밤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두 번째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 전에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에 도착했습니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을 기준으로 멀라이언 파크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인공 정원을 한 TV 다큐멘터리는 이렇게 소개하더군요. ‘도시의 미래’라고.


 난초에서 영감을 받은 거대한 인공 나무가 일제히 불을 밝혀 밤을 알리고, 사람들은 정원 곳곳에 앉거나 아예 드러누워 그 풍경을 감상합니다. 일곱 시 사십오 분, 바람처럼 어딘가에서부터 흘러온 음악에 맞춰 파랑과 검정 사이의 하늘 위로 조명들이 빛을 찍어냅니다. 어렵싸리 젖은 바닥이나마 자리를 잡고 반쯤 누우니 정원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절반은 줄어든 듯 여유로워 깜빡 잠이 들 뻔했습니다. 아시아를 주제로 한 공연 말미에 들린 익숙한 아리랑 선율이 아니었다면 말이죠.


 이 날 같은 공간에 모인 사람들 중 인사를 나눈 이는 없었지만, 말없이 같은 장면을 바라보았던 사람들 속에서 혼자 여행하는 외로움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의 밤은 서로 다른 매력으로 오후의 뜨거움과 다른, 짙은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클라크 퀘이(Clarke Quay)의 야경
실로소(Siloso) 해변의 노을
마리나 베이(Marina bay)의 야경

 그렇게 싱가포르의 밤에 반한 이후, 저는 지난 어느 여행보다도 바쁜 밤을 보내며 하루를 남김없이 즐겼습니다. 세 번째 밤은 센토사 섬에서, 마지막 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루프탑 바에서 다시 마리나 베이의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해가 진 후에도 날씨는 낮 못지않게 무더웠지만, 도시는 매일 밤 멋진 야경을 선보이며 걸음에 화답했습니다. 늦은 밤에야 문 연 식당을 찾던 골목 풍경 역시 그중 하나였고요.


여행자의 밤, 잊고 있던 절반의 하루에 대해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전경

 마치 검은 배경의 오후 같던 화려한 마리나 베이의 밤과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한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슈퍼 트리 쇼에 환호하고, 서로 다른 이유로 모인 사람들의 한결같은 환호와 미소를 보며 지난 여행의 밤들을 추억 했습니다. 해가 지면 하루가 끝난 것처럼 아쉬워하고 숙소에 돌아가 지난 아침과 오후를 꺼내 보기 바빴던 시간들을 말이죠. 건물과 거리가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멋지지 않다거나 사진을 찍기 힘들어서, 혹은 문을 연 식당과 가게가 없다는 이유로 밤은 대부분의 여행에서 조연에 머물렀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달랐습니다.


 떠올려 보면,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여행의 밤은 꼭 하나씩은 눈부신 순간으로 기억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훗날 도시의 이름을 떠올릴 때 어김없이 떠오르는 기억 중 몇몇은 종종 그 여행의 표지가 되기도 합니다. 싱가포르 여행은 시작이 밤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 첫 장면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그간 제가 놓쳤던 절반의 하루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행에서 어렴풋이 느낀, 조금씩 모아 온 밤에 대한 이야기가 이제야 그럴듯한 문장으로 완성된 기분입니다.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졌다 고백했던 그 도시의 밤. 덕분에 앞으로의 여행에서 더 긴 하루와 걸음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브런치 트래블 패스 - 두 번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싱가포르 X 브런치 트래블 패스 그리고 금요일 흐림

모든 이야기 보기


https://brunch.co.kr/@mistyfriday/136

https://brunch.co.kr/@mistyfriday/137

https://brunch.co.kr/@mistyfriday/138

https://brunch.co.kr/@mistyfriday/139

https://brunch.co.kr/@mistyfriday/140


본 포스트는 싱가포르관광청으로부터 일부 경비를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 트래블 패스 - 싱가포르에 다녀오겠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