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로 고통받는 엄마들에게
지옥이란 것은 어디에나 있다.
천국이란 것도 어디에나 있다.
누구나 마음 할 탓이란 이야기가 제일 싫다.
마음을 돌리기가 그렇게 쉬웠으면
생각 다듬기가 그렇게 간단했다면
유튜브에 있는 수많은 강연, 사람들, 책들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깨지고, 이가 나가고 , 금세 상하기 쉽다.
이어 붙이려면 시간도 필요하지만, 과정도 지난하다.
깨지기 전에 잘 붙들고 쓰던지 , 깨지고 나서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 사야 한다.
요 며칠 전 집에 오겠다는 아이가 답이 없다.
불현듯 작년 가을, 그전 또 언젠가가 생각이 났다.
아이에게 왜 집을 나가느냐고 묻지만 항상 답이 없다.
이번에는 연락은 받았으나 제시간에 집에 도착하지 않는다.
자신의 과오를 거짓말로 모면하려다 항상 문제가 생긴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거짓말을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겠지.
바라는 것이 안 될 거라는 걸 안다면 절망이란 걸 하고, 아무 생각 없다가도 무망이란 것을 한다고 한다.
아무 생각이 없으려면 생각의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야 한다.
미래의 어떤 일이 또는 현재의 어떤 일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사람은 불안을 느낀다.
불안이라는 놈은 자존감과 자신감도 떨어뜨린다.
도망쳤다 싶으면 다시 내 곁에서 말을 건다.
절망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불안함이라는 차표는 종착역을 알 수 없게 점점 멀어진다.
맨 처음엔 서울에서 수원까지만 가겠지. 했는데
대전까지로 종착역이 변경되고, 이젠 부산이라고 한다.
부산에 가본 적도 없는데....
이젠 종착역이 지워져 있다.
사실 생각하면 나의 불안감을 아이가 알턱이 없다.
신경 써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한 게 사람이니까.
닥치지 않는 일들이 불안한 것은 아이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믿지 못하는가.
지난 4년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이 그것이다.
왜 믿지 못할 방향으로 아이는 가는 걸까.
사람은 불안감만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의 지점에서 극한으로 가는 그 과정 중에서 견디지 못해서 죽는 것이다.
상대를 죽일 수 없으니 내가 죽어야겠다.
나의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전가한다는 게 불가능할 때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기원한다.
또는 불안함을 제어할 수 있는 상태는 죽음뿐이라고 결론을 내리기가 쉬우니까.
결론은 쉽지만 방법론은 어려운 것.
큰 대로 사거리에서 엉엉 울면서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너는 그러느냐고.
이렇게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너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냐고...
아이를 앞에 두고서 왜 그러느냐고 한참을 울분을 토했다.
눈물이 났다.
남편도 이제는 너무 지치는가 보다.
각자 지금 현재를 보고 자기 탓을 하느라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죄책감과 절망감을 각자 느끼는 밤을 지나고 남편에게
너는 너무 잘하고 있노라고,
아이 유아기에 자기가 있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건 우리의 선택이었고, 나의 잘못이 있었으면 있었지
너의 잘못이나 실패는 아니었다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아이의 모든 잘못에 연대보증인이다.
아이에게 항상 채무를 진 채무자이기도 하다.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한 존재를 낳고 열심히 키웠음에도
오류가 있고, 항상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많다고 알려준 이가 없었다.
내 부모도 , 내 친구도, 누구나 이런 일들은 없다는 듯이
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살아간다.
왜 아무것도 아닌가.
별 일이 아니라 별 일이다.
과거에 잡혀서 실패라는 걸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 일들에 대해서 오려 붙이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그때, 그 당시 너를 이해하려고 좀 더 노력하는 것은
그때를 좀 더 즉시 하는 것.
맨눈으로 나를 더 바라보는 것.
그걸 바라보고 견디야 하는 것.
변명과 간섭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이젠 도망쳐서는 길이 없다.
One Way Ticket을 들고 이미 난 기차에 앉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