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한 불안을 극복할 줄 아는 아이는 자존감이 높다.
"아이들도 시간이 궁금할까? 시계를 볼 줄 모르는 아이들은 시간이 궁금하지 않겠지?"
핸드폰을 모르고 집에 놓고 나왔다. 손목시계도 없었고, 핸드폰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갈 여유도 없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상점들 안을 주시하며 바쁘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처음에는 빠른 걸음을 하며 상점 안을 대충 훑었다.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듯한 상점 쇼윈도 앞에 섰다. 시계가 있을 법 한데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걸까? 프랑스 사람들은 벽시계를 입구 쪽에 걸어놓나?
프랑스 상점에는 그 흔한 벽시계도 탁상시계도 없다.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서는 혼자서 시간을 알아낼 도리가 전혀 없었다.
핸드폰을 눌러대며 궁금하지도 않은 시간을 수시로 확인하던 버릇으로부터 한 번은 자유로와지고 싶었다. 기회가 생겼지만 생각처럼 홀가분하지 않았다. 외국 땅에 홀로 내버려진 기분에 불안했다.
아이들도 시간에 대한 불안감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성인이 가지고 있는 시간에 쫓기는 듯한 불안과는 달리, 시간을 가늠할 줄 모르는데서 오는 불안에 가깝다. 어린아이들이 경험하는 불안 요소는 생각보다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 특징적인 몇 가지를 나열해 보면 : 분리 불안, 밤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패나 성공에 대한 두려움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취침 시간이 되어서 칫솔질을 하고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아이들은 잠을 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부쩍 떼가 늘거나, 책을 더 읽어달라든가, 배가 고프다는 둥, 잠잘 시간을 미루기 위한 요구가 많아지기도 한다. 결국 본의 아니게 말썽을 피운 것처럼 되어 버리고, 부모들은 아이를 다그친다. 반면에, 아이가 부모와 헤어져서 혼자 캄캄한 밤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인지한 부모들은 아이를 안심시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두 방법 모두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이의 두려운 감정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 두려움이 별 것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이에게 두려움을 표현할 발언권을 포기하도록 종용한다. 또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스스로 정확히 읽고 파악하는 과정을 생략하게 한다.
시계를 볼 줄 모르고 시간 개념이 아직 없는 아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불안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아이가 밤에 괴물이 나타날까 봐 무섭다고 말할 때 부모는 괴물에 초점을 두고 아이의 두려움을 묵살하거나 안심시킨다. 아이는 부모가 괴물에 대해서 자신이 불안해한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길 바라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않았다.
"엄마(아빠)는 네가 괴물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엄마(아빠)는 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기에 더 이상 두렵지 않지만,
너는 괴물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어.
엄마(아빠)도 알아, 밤은 매우 길고, 너는 그 긴 밤을 혼자 보내야 해.
그렇지만 그 두려움을 엄마(아빠)가 대신해서 떨쳐줄 수는 없어.
그건 엄마(아빠)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네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거야.
시간이 많이 걸릴 테지만 너는 분명히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괴물이 나타난다면 도망가지 말고 맞서 싸우면 돼.
너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너는 어제도 무서웠지만 잘 해냈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엄마(아빠)가 항상 너의 곁으로 왔잖아.
오늘 밤도 씩씩하게 보내고 나면 또다시 아침이 올 거고,
엄마(아빠)가 네 앞에 분명히 나타날 거야."
아이는 엄마(아빠)가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해 주고, 아이가 스스로 용감하게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해주는 단호한 목소리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운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스스로 극복해 낸 아이는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우리는 그것을 자존감이라고 부른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아기 때부터, 하루 동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미리 나열해 줬다. 스타의 매니저처럼 아이들에게 꼬박꼬박 하루의 스케줄을 일러줬다. 입이 벌어져 침을 흘리는 아기가 눈을 반짝거리며 순진하게 나를 바라본다. 같은 스케줄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아이는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엄마는 지금 젖병에 우유를 탈 거야. 우유를 타 오는 동안 너는 잠시 기다려야 해. 우유를 마시고 나서는 엄마가 조금 안아줄 거고, 낮잠을 자야 할 시간이야. 그러고 나면, 너는 침대에 혼자 누워서 잠을 잘 거야."
엄마가 눈 앞에서 멀어지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 울부짖던 아이는, 하루에도 여러 번 같은 경험을 반복하면서 점차 울음이 잦아든다. 엄마가 항상 하던 그 제스처들을 어김없이 하는지 아이가 한 번씩 고개를 들어 확인한다. 엄마가 우유를 타고나면 금세 자신에게로 올 것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아이는 엄마를 조금씩 기다려 준다.
어린아이들의 일상은 매우 단순하다.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일과도 복잡하지 않다. 무의미하게 항상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항상 같은 일과표에서 시간의 흐름을 배운다. 하루의 일과를 스스로 계획할 수 없는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에게 만들어준 하루 동안, 차차 무슨 일을 해 나가야 할지 미리 알아차리게 된다. 알아 차림은 아이를 능동적으로 만든다. 우유를 마시고 나면 침대에 가서 누울 차례라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조금 투덜거릴지라도 베개에 머리를 스스로 맞댈 줄 알게 된다.
아이가 더 크면 스케줄 단위가 조금 더 길어진다. 잠을 청하는 아이에게 말한다.
"오늘도 하루가 즐거웠니? 어제처럼 오늘 밤도 잘 자고 일어나면 내일 아침이 올 거야. 내일은 (유아) 학교*에 가는 날이니까, 일어나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어야겠지? 그리고 아침을 먹고, 세수하고 이를 닦고 나서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자. 이 모든 걸 하려면 오늘도 푹 자야겠다. 잘 자, 사랑해."
아침에 눈을 뜬 아이가 정말로 엄마가 어젯밤에 말해 준 순서대로 척척 해나가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아이는 반복과 규칙을 통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깨웠을 때 더 자고 싶어서 학교에 가기 싫다는 투정의 강도가 짧고 약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혼자서 다 뜨지도 못한 눈을 하고 티셔츠를 갈아입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들어가야 할 때가 되면 나는 어김없이 한 마디를 했다.
"이제 10분 후에 집에 가자."
1, 2, 3도 세지 못하고,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손가락 열개를 펴 보이면서 10분 뒤에 집으로 갈 거라고 말해주곤 했다. 10분이 무얼 말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은, 처음에는 말해 주나, 말해주지 않으나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런 루틴에 익숙한 나의 아이들은 10분이 지나면 친구들에게 명랑하게 인사하고 담담하게 헤어질 줄 아는 아이들로 성장해 있다.
어린아이들은 지금이 몇 시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숫자로 된 시간은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곧 일어날 일이나, 어제와 같이 오늘도 일어날 일들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면서 시간을 몸소 체험한다. 어른들은 루틴을 싫어한다. 매일마다 반복되는 일상에 진절머리가 난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루틴을 즐거워한다. 이다음에 무엇을 할지 맞추는 것을 놀이로 삼는다. 루틴을 통해서 다음에 할 일을 알아차린 아이들은 지금 하던 일을 마무리하는 법을 배우고, 다음 할 일을 스스로 준비할 줄 알게 된다. 어른들은 변화를 갈구하고, 특별한 재미에 목이 마르다. 그러나 아이들은 루틴 속에서 안정을 찾고, 루틴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키운다.
하루를 여러 개로 쪼개던 루틴의 단위가, 하루에서 또 일주일로 커지고, 한 달, 일 년 단위로 길어진다. 나의 아이들은 두 달짜리 여름 방학이 오면 각자 달력을 하나씩 그린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남았냐며 하루에도 몇 번을 묻기에, 그런 아이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달력을 그려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기다리는 날이 있을 때마다 제 스스로 달력을 그렸다. 글을 쓸 줄 몰랐을 때였는데, 한 번은 두가 하루하루를 보낼 때마다 작은 네모칸에 하루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그림으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일과를 꾸려나가는 모습이었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몸소 체험하는 모습이었고, 그 시간의 주체가 되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아이들과 함께 만든 일 년 단위의 루틴을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계획을 세워 주지도, 그것을 세워서 지키라고도 가르치고 싶지 않다.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식사를 하면 이를 닦고, 친구를 만나면 즐겁게 놀다가, 안녕하고 헤어지는 것과 같은 일상을, 우리는 지켜야 하는 계획이라고 하지 않는다. 시간을 볼 줄 모르는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어가도록 도와주는 엄마의 관심과 기다림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4월의 봄바람이 코끝에 맴돌면 부활절이 곧 다가온다. 아이들은 지난봄 냄새를 통해서 올해의 봄 냄새를 맡는다.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이 들면 곧 산에 가서 밤과 도토리를 줍자고 한다. 우리가 지난해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올 해에도 우리는 분명 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걸 아는 아이들은, 올해에는 주어 모은 것들을 담을 종이 바구니를 만들자는 기특한 생각을 해낸다.
나의 두 아이는 엄마가 한국인이고 아빠가 프랑스인 혼혈아이들이다. 프랑스에서 나고 줄곳 프랑스에서 자랐다. 이런 이유로 이 아이들의 일상이 독자들에게는 조금 이국적이거나 특별해 보일 수 있다. 한국에는 어린이 날이나 스승의 날처럼, 프랑스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한 날들이 있다. 또, 한복을 입고 송편을 먹으며 설날을 보내는 모습도 프랑스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 아이들의 일 년 단위 루틴도 이곳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국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단지, 아이들이 그들의 시간을 각자의 시간과 배경 속에서 풍요롭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문화란 별것이 아니다. 일상이 반복되고, 그것이 의미롭게 되기 시작하면 곧 크고 작은 컬처가 만들어져 간다. 아이들이 작년 이맘때 했던 것을 올해 이맘때 다신 또 하는 것이 5년, 10년 반복될수록 그들의 문화의 뿌리가 점점 더 단단하게 깊어져 감을 의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먼저 유아학교에 다닌다. 유아학교는 3년제로, 국적에 제한 없이, 만 3살이 된 아이들이 모두 입학을 할 수 있다. 프랑스 현 마크롱 정부는 2019년 가을 학기를 시작으로 유아학교를 의무교육으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의무교육으로 공식화되기 이미 이전부터 의무 교육 여부를 따짐이 무의미할 만큼 프랑스에서 사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유아학교를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