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나는 평소 내 나이를 헤아리지 않고 살고 있는데, 친구들 말로는 내가 올해 들어 한국 나이로 50이란다. 이 나이에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흉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이 나이에 “아빠, 사랑해요.”라는 마치 동요 가사와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이제 아빠는 이 말을 들을 수가 없지만 말이다.
우리 아빠는 2020년 2월 3일 오후 4시가 조금 안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1940년에 이 세상에 나셨으니 한국 나이로는 팔순을 갓 넘긴 나이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만큼 사시다 가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이었고, 이런 식의 이별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살가운 가족은 절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아빠는 건강하신 분이었다. 15년 전쯤 결석으로 XX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으신 적은 있었으나 잠깐 동안의 입원이었다. 아빠는 평상시에 감기 외에는 잔병치레를 해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상도동으로 이사 온 후부터 40년이 넘는 동안 동네의 국사봉을 매일 아침 다녀오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분이었다. 정년이 넘도록 다니던 회사를 아파서 결근하는 모습을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평소 자주 체하고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던 엄마의 건강을 걱정한 적은 있었으나, 아빠의 건강에 대해서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아빠 방에 보이던 약 봉투를 보면서 아빠가 어느새 약해지셨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모두 아빠가 최소한 90세까지는 거뜬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20년 1월, 나는 싱가포르에 있는 IT 회사에서 아직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2011년 9월,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 같은 회사의 싱가포르 사무실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 반년을 넘게 고민하다가, 민준이를 데리고 2012년 6월부터 싱가포르에 가서 살고 있던 중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도전해 보지 않았다가 죽을 때 후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보다는 민준이에게 오히려 값진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판단 하에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다. 이에 앞서 막내 동생네 부부를 호주로 이민 보낸 바 있던 엄마가 같은 아파트의 같은 동에 살고 있던 나까지 외국으로 간다고 하니 엄청 심란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싱가포르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부모님이나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일 년에 한 두 차례, 짧으면 1주일, 길면 2주일의 휴가를 내서 한국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고, 한국에 가더라도 엄마나 아빠를 볼 수 있었던 건 기껏해야 하루 이틀 정도가 다였다.
이제 민준이가 싱가포르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는 시기이기도 했고, 한국에 갈 때마다 달라지고 있던 부모님의 모습에 걱정도 많이 되던 참이어서, 2월 중순 퇴사 후 3월 중순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지난 12월에 한국에 갔을 때, 싱가포르에 돌아가기 전날 짜장면을 한번 더 먹겠다고 엄마네 집에 가서 중국집 배달 음식을 주문했었다. 그런데 그 날, 아빠가 요즘 며칠 속이 안 좋다고, 안 드시겠다고 했었다. 우리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계속 속이 안 좋으면 동네 병원에 가시지 말고 큰 병원으로 가서 제대로 된 검사를 받아 보시라고 했었고, 아빠는 그러겠다고 했었다. 며칠 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방어회를 떠다 먹을 때만 해도 맛있게 잘 드셨던 것으로 기억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날 우리가 집을 나올 때 작별 인사를 하는 아빠의 얼굴이 서글퍼 보였던 건 그냥 내 기분 탓이려니 했었다.
싱가포르에 돌아온 후 아빠의 그 얼굴이 계속 떠올라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아빠가 어떤지 물어보았으나, 엄마는 또리 잘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또리는 우리가 키우던 강아지인데, 나와 민준이가 싱가포르에 살게 된 이후 주중에는 엄마네 집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우리 집으로 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안 하던 기침을 하길래 동물 병원에 데려갔는데, 심장병 진단을 받아서 온 식구들이 걱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며칠 후 설 연휴 전날이었던 1월 23일 다시 전화를 해서 아빠는 어떤지 물어보았고, 엄마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힘이 없는 목소리로 아빠가 좀 아프다는 말을 하고,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말라면서 전화를 얼른 끊으려고 했다. 엄마는 항상 한국에는 별일 없으니 내 몸이나 잘 챙기라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아빠가 아프다는 말을, 그것도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하는 걸 보니 느낌이 이상했고, 나는 바로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가 아빠 아프다고 그러던데,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야?”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남편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야, 장인어른 지금 XX 병원에 입원해 계셔.”
나는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계속되는 남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지난주 토요일에 오랜만에 또리 데리러 장모님 댁에 갔는데, 장인어른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시더라고. 왜 지난번에 저녁 먹으러 갔을 때 속이 안 좋으시다고 했었잖아. XX 병원에 검사 예약을 해놓으시긴 했는데, 2월에나 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그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하시는 걸 지금이라도 응급실로 가보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XX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어. 그 날부터 병원에 입원하셔서 이번 주에 이것저것 검사받으시고, 그동안 두 차례, 화요일과 목요일에 복수도 빼셨거든. 오늘 담당 교수 면담이 있어서 장모님이랑 같이 갔었는데...”
사실 나는 이 순간까지도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뭐라는데?”
“췌장암 말기이고, 암이 장기 여기저기에 이미 전이가 많이 된 상태여서 치료는 불가능하대. 의사가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사실 수 있다고 하더라고. 지금 할 수 있는 건 남은 시간을 좀 더 늘리기 위한 치료밖에 없대.”
“……”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복수가 계속 차니까 장인어른이 숨쉬기 힘들어하시고, 속이 답답하니까 식사도 잘 못하시는 건데, 병원에서는 복수가 차는 게 췌장암 말기 증상 중 하나이고, 췌장암으로 인해 복수가 차는 건 정확한 원인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치료하기가 더 어렵다고 하더라고. 지금 단계에서는 항암 치료를 하더라도 암세포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고, 진행 속도를 늦춰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거래. 의사가 항암 치료를 시도해 보겠냐고 묻길래 장모님이랑 나랑은 뭐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어. 병원에서 지금 염증 수치를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이번 주 들어 처음 입원하셨을 때보다 수치가 좋아졌다고, 담당 교수가 월요일부터 항암 치료를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 담당 교수 만나기 전에 주치의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 담당 교수 말이 맞겠지.”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게 나한테 그리고 우리 아빠한테 일어난 일이 맞는 건가?
“그럼 지금 아빠는 병원에 혼자 있는 거야?”
“요즘에는 병동에 보호자가 8시까지만 있을 수 있더라고. 낮에 장모님이 가 계시고, 밤에는 내가 잠깐 가보기도 했는데. 오늘은 담당 교수 면담이 있어서 오후에 반차를 냈던 거였고. 내일부터는 연휴니까 내가 좀 더 가 있으려고. 장모님이 힘들어하셔서.”
“내가 당장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장모님 생각도 그렇고 내 생각에도 장인어른이 몇 주는 더 버티실 것 같은데, 2월에는 한번 와야 할 것 같아. 뭔가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무래도 사위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뭘 결정해야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다시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다.
“엊그제 밤에 장인어른이 나한테 전화하셔서는 연명 치료 같은 건 하지도 말라고 하시더라고. 내가 그 말씀을 듣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마음만 얼마나 아프던지…”
아빠는 연명 치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나 한 말일까?
“장인어른께는 사실대로 말씀 못 드렸어. 의사들은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한다고 했는데, 다 말씀드리면 치료 안 받겠다고 하실까 봐. 일단 간암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말씀드렸고, 의사들한테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장인어른께는 치료 잘 받아 보자고 말씀드린 상태야.”
“일단 끊어.”
인터넷에서 췌장암을 검색해 보았다. 초기 증상이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이 되는데, 발견이 될 때쯤에는 치료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암 중에서도 생존율이 가장 낮은 암 중의 하나였다. 어이가 없었다.
다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이 상황이 결코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미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또 전화를 했어?”
“민준이 아빠한테 방금 다 들었거든? 엄마는 왜 이런 상황에서도 나한테 말을 제대로 안 해? 아빠 지난주부터 입원해 있었다던데 왜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 해?”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가 말한다.
“말하면 뭐해? 거기서 오지도 못할 텐데 더 신경만 쓰일 거 아냐. 아빠는 민준이 아빠랑 여기 있는 사람들이 돌보면 되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거기 일이나 잘 마무리하고 와. “
“이 상황에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내가 내일이라도 당장 가야 하는 거 아냐?”
“아빠 병원에 한참 있어야 할 거 같아. 복수 때문에 집에 있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안 와도 될 것 같아.”
전화를 끊고 나서도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잠은 오지 않았다. 아빠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병원에 계시다면서요. 많이 아파요?”
아빠로부터의 답장은 다음날 새벽에 받을 수 있었다. 밤새 이것저것 검색해 보느라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던 상태였다.
“걱정하지 마. 견딜만하니까.”
“아빠,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돼요. 맨날 참고 견디지 말고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치료 잘 받아 보자고요.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어야 치료 효과도 좋다잖아요. 퇴원하면 어디로 여행 가고 싶은지 그런 즐거운 생각을 하고 계세요.”
그날 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거울을 보니 눈과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회사에 출근은 했으나 일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마침 싱가포르 역시 설 연휴 시작 전날이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집으로 일찍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도 불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내일부터 연휴가 시작되는데 다만 일주일이라도 한국에 다녀와야 하는 게 아닐까? 아빠가 치료를 받기 시작하는 거라도 보고 와야 하지 않을까?
“민준아, 지금 할아버지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대.”
“어디가 아프신데?”
“암에 걸리셨대. 할아버지가 걱정돼서 엄마가 좀 가봤으면 좋겠는데, 널 여기 혼자 두고 가자니 네 걱정도 되고. 엄마가 지금 정신이 너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여기 혼자 있으면 되지. 내가 밥 챙겨 먹고 다 할 수 있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는데, 그래도 엄마는 너 혼자 여기 두고 가는 게 걱정이 많이 돼. 같이 갈래?”
“나는 여기 와서 매일 하던 게 있는데, 지금 또 한국 가면 그 리듬이 깨져. 나는 여기 좀 더 있다가 나중에 갈 테니까 엄마 먼저 가. 할아버지는 엄마 아빠니까 엄마는 빨리 가봐야 할 거 같은데.”
다행히 당일 밤 출발하는 직항 항공권을 구할 수 있었다. 민준이가 먹을 반찬까지 만들어 놓고 갈 시간은 되지 않았고, 그래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민준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대충 짐을 싼 후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향했다. 지하철 타는 곳까지 민준이가 짐을 들어다 주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다. 은근히 속 깊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가끔씩 들곤 한다.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 안, 요즘 한국에서 암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펜벤다졸에 대해 검색해 본다. 복용법과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를 체크해 본다. 그 와중에도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는데, 한국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외국 사람들은 타인의 이상한 행동에 한국 사람들처럼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공항 도착 후 비행기 탑승 전까지 이 사이트 저 사이트를 한참 동안 검색해 보고서야, 펜벤다졸이 제품 명이 아니라 약의 성분이고, 이 성분이 파나큐어(Panucur)라는 개 구충제에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문을 해야 하는 것은 파나큐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펜벤다졸의 체내 흡수를 도와주기 때문에 같이 복용해야 한다는 다른 약들을 리스트업 하고, 쇼핑몰을 체크해 보았다. 몇 시간에 걸친 검색이 허무하게도 쇼핑몰에서는 필요한 약들이 이미 세트 상품으로 구성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그나마 빠른 배송을 해준다는 사이트 주소를 민준이 아빠에게 보내주고 주문을 부탁했다.
작년에 의사들이 TV 프로그램에 나와 펜벤다졸 관련 토론을 벌이는 것을 보았을 때만 해도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내가 펜벤다졸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사들이 복용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 자신이 너무나 절박한 마음이 되었고, 펜벤다졸 복용 후 암세포가 없어지거나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말하는 여러 환자들의 사례를 찾아보면서, 아빠도 펜벤다졸을 드시면 증세가 호전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왜 한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것인지, 외국에서 구매하면 배송만 최소한 일주일이 걸릴 텐데, 하필 지금이 설 연휴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배송은 더 지연될 수 있을 거라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너무나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싱가포르에서 자정 가까이에 출발한 비행기는 다음날 아침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엄마네 집으로 바로 갔고, 연락도 없이 간 거였기 때문에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는 기색의 엄마를 두고, 잠시 후 연락이 되어 엄마네 집에 도착한 민준이 아빠와 함께 아빠를 보러 병원으로 갔다.
“장인어른이 병원 밥이 맛이 없다고 잘 안 드셔. 그래서 집에서 동치미를 갖다 드렸더니 그나마 동치미 국물이랑 좀 드시더라고. 속이 계속 답답하다고, 어제는 시원한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시던데…”
한국은 설 연휴 이틀째 되는 날로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았다. 병원 가는 길에 보이는 분식집 메뉴에 물냉면이 보이기에 일단 하나를 포장했다. 병원 역시 설 연휴 기간이어서 한산했고, 최소한의 인력으로만 운영되고 있는 상태였다. 병동에 도착했고, 나는 눈물이 나는 걸 간신히 참고, 아빠가 계신 병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빠는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지난달보다 수척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코에 산소 흡입기를 하고 있었고, 검지 손가락에는 집게 같은 것이 집혀 있었는데, 그 집게는 산소 포화도와 맥박을 체크하는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팔에 꽂힌 주사 바늘을 통해서는 항생제를 비롯한 여러 팩의 약들이 아빠의 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아빠를 보는 일은 그게 심각하지 않은 병일지라도 자식들의 가슴에 커다란 자국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아빠, 저 왔어요.”
아빠가 놀라면서 나를 쳐다본다.
“네가 어떻게 왔니? 뭐하러 왔어?”
“아빠가 아프다니까 걱정돼서 왔죠.”
“먼 데서 뭐하러 왔어? 민준이는 어쩌고?”
“민준이는 싱가포르에 혼자 있어요. 한국에 와야 제 맘이 편해질 것 같아서 온 거예요. 많이 아프세요?”
“견딜 만 해. 근데 속이 좀 답답해.”
“코에 이런 거 하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요?”
“그거 하니까 숨 쉬기가 좀 편해. 산소 넣어 주는 거래.”
“치료받으면 좋아질 수 있다니까 병원에서 하자는 대로 치료 잘 받아봐요. 빨리 나아서 집에 가야죠. 월요일부터 치료 시작한다고 했다던데, 아빠가 낫고 싶다는 의지를 갖는 게 제일 중요해요. 혹시라도 돈 걱정 같은 건 하지 마시고요. 제가 싱가포르 가서 돈 많이 벌었어요.”
“그레, 알았다.”
“아빠, 냉면 드시고 싶었다면서요? 오는 길에 사 왔는데 지금 좀 드릴까요?”
“냉면 사 왔어? 그래 좀 먹어보자. 거기 종이컵에 조금만 담아 봐. 많이는 못 먹어.”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식판을 펴신다. 나는 종이컵에 냉면 소량을 넣고 아직 얼음이 덜 녹아 시원해 보이는 육수를 섞어 아빠한테 드렸다. 평소에 면을 좋아하셨던 분이라 맛있게 드시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많이 드시지를 못한다.
“시원하네. 병원 밥은 싱거워서 못 먹겠어.”
“냉면 말고 또 드시고 싶은 거 생각나면 말씀하세요. 그런 거 이야기해 주시는 게 저희 도와주는 거예요.”
“그래. 또 뭘 먹어봐야 하나?”
아빠는 아이처럼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지신 듯했다.
이 날로부터 9일 후 아빠는 돌아가셨다. 아빠의 마지막 순간도 봤고, 화장하는 것도 봤는데, 나는 아직도 이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