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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Sep 12. 2022

와야 국민학교

엄마의 이름




밭에서 잡초라도 뽑고 있을 때면 책보자기를 맨 동네 오빠가 먼지 풀풀 날리는 밭두렁을 따라 학교에 오가곤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집에 가서 엄마를 조르고 울고불고했다. 일곱 살에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평지도 아닌 30리 길을 어린 계집아이가 혼자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우겨서 들어갔지만 몇 번 못 가서 포기하고 말았다.


여덟 살에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하얀 저고리에 무릎까지 오는 까만 치마를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자기에 책을 돌돌 말아 허리에 동여 매고 걸었다. 개울을 지나 얕은 강을 건넜다. 엄마는 농사일과 집안일에 치여 도시락을 싸준 적이 거의 없었다. 학교에 가서 점심을 쫄쫄 굶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집에 오면 기진맥진했다. 학교 간다고 하면 못 가게 막진 않았지만 밥을 먹는지 굶는지 관심이 없었다. 소풍 때라도 챙겨주면 좀 좋을까? 소풍날 아침에 죽 같은 나물밥을 해놔서 싸가지도 못했다.


그마저도 비가 오면 강물이 불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일손 바쁠 땐 일 도우라고 해서 못 갔다. 학교를 자꾸 빠지니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기초가 안 되어 있어서 수업이 어려웠다. 내 생각에 난 공부만 좀 했으면 뭐라도 됐을 건데... 아부지 말씀처럼 선생님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동네 어느 집 부모는 장마가 지기 전에 강 건너 친구네 집에 쌀을 지어다 주고 친구네 집에서 아이가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그 아이는 장마 때도 학교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그 친구가 너무나 부러웠다. 아부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내 처지도 달라졌을까.


내가 태어났을 즈음 한국에는 신식 패션 바람이 불었지만 강원도 깡촌에는 그런 옷을 입는 아이가 없었다. 개중에 조금 넉넉한 집 아이들은 색깔이 들어간 스웨터를 입기도 했는데 볼 때마다 신기했다. 난 언제나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만 입었다.


와야 국민학교 5학년 운동회 때였다. 5, 6학년이 마스게임을 했다. 아이들이 줄을 맞추어 여러 동작을 절도 있게 하고 마지막에 운동장만큼 넓게 퍼져서 '와야 국민학교'를 만들었다. 운동회 준비 복장이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였다. 이때 엄마는 처음으로 시장에서 빨간 천, 노란 천을 끊어다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칙칙한 검은색이 아닌 알록달록한 옷을 입으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뒤로 내 외출복은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가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플레어 치마에 블라우스를 처음 입기 시작했으니 도시보다 10년은 늦은 유행이었다.


큰오빠는 결혼을 하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가서 누군가와 싸웠다가 다치게 했다는 연락이 왔다. 올케와 엄마는 합의금을 마련하느라 동부서주 했다. 다음날은 내 졸업식이었다. 평생 한 번뿐인 졸업식인데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졸업식은 갈 수 있겠지? 골치를 앓고 있는 엄마에게 슬쩍 물었다.

"엄마, 나 내일 졸업식인데..."

엄마의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계집애가 졸업식은 무슨 졸업식이가! 니 오빠가 큰일이 나게 생겼는데, 그깟 졸업식이 지금 대수가?"

나는 더 이상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나는 졸업식에 가지 못했고 졸업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엄마의 이름 앞 이야기>

1. 시작

https://brunch.co.kr/@miyatoon/20

2. 프롤로그-영웅 영숙이

https://brunch.co.kr/@miyatoon/37

3. 우리 영숙이는 선생님 시킬 거라......

https://brunch.co.kr/@miyatoon/38

4. 호랭이는 뭐하나, 저 간나 안 물어가고!

https://brunch.co.kr/@miyatoon/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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