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로 오게 된 일
튀르키예에 온 것은 2020년 8월, 코로나의 여파가 전 세계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여러 날들 중 하나였다.
여름이었고 공항은 적막했다.
출국날, 그 큰 인천 공항에 나와 남편, 32kg이 나가는 우리 집 큰 개, 그리고 100kg에 육박하는 우리의 이삿짐이 전부인 것 같이 공항을 오고 가는 사람이 적었다. 결혼한 지 이제 6개월에 접어들던 때였다. 튀르키예행이 결정은 구체적인 결혼 날짜가 오가던 2019년 말, 남편의 갑작스러운 교수직 제안을 받은 직후였다. 남편은 나의 결정을 따르겠노라 했다. 튀르키예라는 나라에 대해 나도 남편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미국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었던 남편과,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던 나 사이에 어떤 교집합도 찾을 수 없는 나라이기도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외국에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곳이 튀르키예가 되리라고는 둘 중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낯선 나라였다. 하지만 남편에게 온 제안은 갓 박사 학위를 마친 남편에게는 솔깃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학문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안정된 지위와 공간을 내어준다는 학교의 제안 어떤 것보다 강력하고 달콤했다. 한동안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튀르키예 측 학교에서 내보이는 여러 장점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눈과 귀를 닫았다. 어디를 가든, 장점이야 즐겁게 취하면 되는 부분들이다.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그곳에 가게 됨으로써 겪게 될 어려움과 그를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였다. 그간 내가 커리어를 위해 해 오던 일도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친구와 가족과도 멀어져야 할 것이었다. 내가 자국민으로서 누리던 내 나라 안의 소소한 편의와 즐거움도 사라질 것이었다. 새로운 나라에 간다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나라의 시스템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건, 당장 내 손에 든 쓰레기를 어디에 담아 어디에 버리는지, 그런 자잘한 일부터 다시 배우고 익혀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 겪어봤기에 더 뼈저리게 알고 있는 부분이었고, 그 탓에 결정을 주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함께 헤쳐나갈 사람이 옆에 있다면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못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주된 일은 남편보다는 지리적인 제약이 적은 일이었다. 그림은 한국이든 튀르키예든 어디서든 그릴 수 있었다. 2019년 12월 말, 결혼을 두 달 앞두고 남편과 함께 튀르키예로 견학을 왔다. 이곳 학교도 둘러보고, 전반적인 나라의 분위기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튀르키예의 겨울은 습했고 빵과 음료가 맛있었다. 짧은 여행으로 그 나라를 다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손님으로 온 나와 남편을 귀하게 대해주리라는 믿음 정도는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튀르키예에는 이제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눅진하고 진한 사람 냄새가 났다. 2주의 견학을 마치고 우리는 튀르키예에 함께 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간혹 남편을 위해 그 멀고 낯선 나라까지 어떻게 갔냐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튀르키예에 온 것이 그저 남편을 위한 결정이나 헌신이 아니었다. 내 미래와 상황을 살펴 어느 정도 저울질을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그간 자라면서 봐온 어리석은 어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내린 결정은 누구 때문이었다거나 무슨 상황 탓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어른들 말이다. 꼭 무언가 일이 틀어졌을 때 쉽게 남을 탓하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이해되지 않았다. 때문에 튀르키예에 온 건 남편을 위한 내 희생이 아니었다. 그건 온전한 나를 위한 결심과 결정이었다.
튀르키예로 오는 일에 대해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던 일은 다시 차근차근 찾으면 되었고 가족 친구와의 연락은 인터넷만 있으면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됐다. 다만 아이를 가지는 일은 염려가 되었다. 결혼할 때 내 나이는 이미 만 34살로 적지 않은 나이였다. 결혼 전에 이미 남편과 아이를 가질 계획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낯선 타국으로 떠날 것이 결정된 상황에서 당장 임신을 논하기에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당장 한국에 있는 집을 정리하고, 다시 튀르키예에 터전을 구하는 일만 해도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곳에 적응을 하고 행정적인 부분을 처리하는 등 해야 할 일들 역시 뻔히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당장 아이를 가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결혼 직후 거대한 팬데믹 상황이 전 세계를 그야말로 덮쳐버렸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발견된 코로나 확진자는 5명 내외였다. 그랬던 것이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에는 집 밖을 한 발짜국도 나가면 안 되는 상황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치고 빠진 결혼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상황 속에서 한국-튀르키예 양국의 상황을 조율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코로나로 물류 운송에 차질이 생기면서, 단순히 짐 하나를 미리 보내놓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의 튀르키예 입국 서류도 몇 달이 지연되고서야 간신히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튀르키예로 온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고 느꼈던 것이 약 1년쯤 지났을 때였다. 2021년 말부터 남편과 구체적으로 임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젊게 살든, 건강하게 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임신에서 여성의 나이는 깡패라는 말이 있다. 그때가 내 나이가 만 35세, 곧 만 36세를 앞둔 시점이었으므로 이제 노산이라는 키워드가 내 옆으로 찰싹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꼼짝없이 노산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