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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Dec 25. 2023

지난여름, 산에게

첫 번째 임신과 유산

 임신에 대해, 그리고 자녀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하거나 말해보지 않은 여성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평생 아이를 가지지 않을 여성이라도 필연적으로 한번 이상은 그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성으로 태어나 아이를 낳는다는 건 아주 평범하디 평범한 삶의 과정 중 하나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당연했다. 혼기가 찬 20대 여성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건 당연하다 못해, 하지 않으면 죄인이 되기에 딱인 시절이 퍽 오랜 기간 이 사회에 존재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내 유년은 그 기간 안에 존재했고, 막 사춘기가 지날 무렵 시작한 ‘생리’는 내 나이의 성숙함을 뜻하기에 앞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알리는 증상이라 배우던 때였다. 그런 인식의 전환점은 내가 막 대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에 찾아왔다. 더 이상 아이를 낳는다는 게 여성에게 당연한 의무처럼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여성의 ‘당연한’ 임신은 이제 ‘꽤나 하기 힘든, 또 대단한’ 임신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어릴 때 배웠고 예상했던 '적령기' 임신은 나와 아무런 인연도 맺지 못한 채 유유자적 그 자리를 떠나고 나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오랜 기간 ‘자궁’은 나에게 꽤나 외면받던 장기였음을 실토한다. 결혼이라는 화두가 눈앞에 떠오를 때쯤, 자궁은 오랜 기간 산간벽지에서 외면받던 관직자가 서울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 듯, 삶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본격적으로 ‘임신’이나 ‘자녀’, ‘출산’이 주변인들과의 대화 소재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 낡고 녹슨 기관을 이제 닦고 조이고 기름칠할 때가 왔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다.


 결혼과, 해외 이주와, 각종 서류와 낯선 환경이라는 장애물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을 즈음, 우리에게 올 아이에게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어렵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떤 면으로는 현실적인 내 나이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기도 했다. 만 36세라는 나이가 코앞이었다. 몇 시간을 거뜬하게 걷던 체력도 과거의 말이었다. 실제로 느껴지는 체력 저하도 더 이상 임신을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는데 일조했다. 피임을 하지 않는 것 이외의 임신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나도 남편도 아는 바가 없었다. 임신을 준비하려들자 첫 번째로 내 불규칙한 생리 주기가 문제였다. 도무지 가임기를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각하게 생리 주기가 불규칙적인 사람으로, 첫 생리를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일정한 주기로 생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특히 해외에서 유학하던 시기에는 예민함과 잦은 스트레스로 인해 3~4개월 생리일을 건너뛰는 것은 예사였다. 그 탓에 산부인과에서 검진을 받을 때면 호르몬이 어쩌고 하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이 발견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렇다 하게 내 상황을 개선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친구로부터 ‘배란 테스트기’에 대해 듣게 된다. 원리는 간단하다. 난소에서 난자가 배란되기 직전, 체내 황체호르몬 수치가 급격하게 증가한다. 배란 테스트기는 이 황체호르몬에 반응하므로 배란 테스트기에 반응이 오는 날 남편과 합방을 하면, 배란된 난자와 정자가 만날 확률이 높아지고 당연히 임신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는 원리이다. 그렇게 배란테스트기를 사용하여 임신을 시도한 지 몇 달 만에, 우리는 임신에 성공했다. 역시 과학의 힘은 대단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아직 튀르키예로 와서 병원이라는 곳을 경험해보지 않은 때였다. 단순 감기가 아닌 어느 때보다 예민한 임신으로 인한 병원 방문이다 보니 기대보다 걱정이 컸다. 남편은 얼마 전 막 셋째를 출산한 동료 교수에게 괜찮은 산부인과 의사를 소개해주길 부탁했다. 얼마 후, 남편과 처음으로 산부인과에 방문했다. 마스크로 얼굴의 반 이상은 가려져있지만 희끗하게 보이는 흰머리카락으로 어느 정도 나이가 지긋한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사는 차분하고 따뜻하게 우리 부부를 맞아주었다. 차가운 초음파 기기로 들여다본 자궁 안에는 동그랗고 까만 아기집이 돋아나 있었다. 튀르키예 병원에서 사용하는 초음파 기기는 약간 오래된 탓인지 영상이 또렷하지 않았다. 동그란 아기집과 그 안에 보이는 점 같은 태아. 희뿌옇게 인쇄된 초음파 사진에서 나는 선명하게 한 생명의 존재감을 느꼈다.

 생각만큼 임신까지 다다르는 길이 험난하지 않았던 탓인지 나와 남편 모두 안일하게 행복해했다. 나는 임신 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거뜬하게 해내리라 여겼고, 남편 역시 굳이 내 행동과 이동에 큰 염려를 하지 않았다. 막 임신 7주가 넘어가던 어느 봄날의 밤이 기억이 난다. 나는 남편과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남편의 비스듬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행복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약간의 피가 보이고 아이의 심장소리가 느려지고 결국 그다음 날 아기의 심장이 멈추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 전까지, 나는 내 아이와 보낼 그해의 겨울과 이듬해의 1년의 육아를 내내 생각했던 낮과 밤이 있었다.

유산 판정을 받은 다음날 소파 수술을 했다. 계류유산. 소파수술.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낯선 단어들이 내 몸에 차갑게 스며들어 현실이 되었다. 더 이상 내 자궁에 까맣고 동그란 아기집은 없었다. 나는 임신으로 부풀었던 젖가슴만 남은 몸이 서러워, 하염없이 절망했다.

 눈앞에 새카만 구멍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했던 내일도, 다음 달도, 아이가 태어났을 내년이라는 다가오지 않을 시간도 모두 다 그 새카만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갔다. 나는 멍하게 침대에 앉아 그 구멍에 나도 빨려 들어가기만을 절실하게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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