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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Jan 12. 2024

지난여름, 산에게

임신을 하고 하고 싶었던 것-1

1. 예쁜 임부복을 사 입기

 예쁜 임부복에 대한 환상까지는 아니지만- 임산부들의 불러오는 배를 위해서 넉넉하게 디자인된 옷을 보면, 그 옷을 디자인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퍽 좋아 보이곤 했다. 처음 임신을 하고 출혈로 누워있으면서 나는 일부러 임부복을 찾아보지 않았었다. 내 임신은 늘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아주 가까운 미래를 준비하기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입원 후, 엄마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에서 나와 비슷한 주수의 임신부들이 나누는 소소한 대화들을 엿보는 것이 하루 중 몇 안 되는 즐거움이었다. 임신 5개월을 넘긴 사람들은 어디서 예쁜 임부복을 파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는 밝은 개나리색에 품이 크면서도 통풍은 잘 되는, 레이스같이 화려한 장식은 없이 통짜로 떨어지는 원피스를 임부복으로 입어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푸른 계열의 원피스도 좋을 것 같았다. 밖은 어느덧 여름이 찾아오고 있었으므로 파란 원피스를 입으면 시원해 보일 것도 같았다. 예쁜 임부복을 판다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괜히 살 수도 없는, 그렇지만 내 취향에 꼭 맞는 원피스들을 둘러보고 은근슬쩍 위시리스트로 남겨두기도 했다. 어차피 나는 출산 전까지 이 꾀죄죄한 환자복을 단벌 임부복으로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진 채로, 종종 생각이 날 때마다 임부복을 둘러보곤 했다. 


2. 불러오는 배 사진을 찍기

 한국에서는 보통 출산하기 직전에 만삭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언니가 첫째 조카 임신 때 찍었다는 만삭사진을 본 적도 있다. 나는 그렇게 스튜디오에 가서 찍는 건 약간 부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다. 대신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남편에게 부탁해서 차곡차곡 불러오는 배를 감싼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임신 전부터 있었다. 집에서도 좋겠고 집 앞에 있는 공원에서 함께 사는 반려견과 함께 찍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내 배는 5개월 무렵, 그러니까 고위험 산모 치료실에 입원하고 나서야 조금씩 눈에 띄게 불러왔다. 하지만 나는 내 불러오는 배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병실에는 화장실에 있는 거울 1개와, 병실 내부 벽에 걸려있는 거울 1개가 내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거울은 얄밉게도 딱 쇄골 높이까지만 보이는 사각형의 작은 거울이었다. 까치발을 들어 내 배를 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원하던 사진은 한 장도 찍어둘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많이 아쉽다. 


3. 맘 편하게 화장실을 가기

 6인이 머물 수 있는 병실에는 1개의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 겸 샤워실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오래된 건물에 설치된 공간답게 샤워시설과 세면대가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이러나저러나 씻기에 매우 협소한 장소였다. 물론 병원답게 위생 상태는 항상 훌륭했다. 나는 화장실을 매우 심하게 가리는 편이라 신혼여행지에서 남편과 다투기까지 할 정도였다. 작은 일(?)은 그렇다 쳐도 큰 일은 반드시 나와 안면이 있는, 단독의 변기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탓에 남편과 아이쇼핑 중 갑자기 온 큰 일; 신호로 인해 호텔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나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다인실 입원은 처음이다 보니 입원 후 화장실을 가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변기 낯가림은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었다.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간혹 식사 시간과 나의 큰 때(?)가 맞으면 매우 곤욕스러웠다. 내 원초적인 소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위험 산모 치료실 바로 옆에는 입원 중 진통이 온 환자들이 머무는 진통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은 있는 화장실은 자주 빈 채로 있다는 꿀정보를 들은 후,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진통실 화장실을 찾은 적도 많았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표면적인 부분일 뿐이고, 제일 큰 문제는 화장실을 찾기 전 찾아오는 심리적은 두려움이었다. 양수가 새는 증상은 24시간 내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혹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기 위해 변기에 앉는 순간 양수가 쑥 하고 흘러나왔다. 그러다 보니 소변을 보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도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이미 자궁에서 흘러나온 양수가 고여있다 빠지는 증상이므로, 내가 화장실을 더 자주 찾는다 해서 더 많은 양의 양수가 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그런 증상을 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보니 점점 화장실 가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한편, 큰 일을 보는 건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순위의 일이었다. 큰 일을 볼 때면 간호사분들이 자주 주의를 주곤 했는데, 하나는 변기에 오래 앉아있지 말 것, 두 번째는 배에 쓸데없이 많은 힘을 주지 말 것, 이 두 가지였다. 자칫 배에 힘을 줬다가 양수가 더 새거나, 찢어진 양막에 영향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배설의 쾌감이라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항상 주의해야만 했다. 출산 전까지 이 부분이 생각보다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4. 마음껏 씻기

 항생제와 수액을 맞기 위해 팔 한쪽에는 항상 라인을 잡고 있어야 했으므로, 원하는 때에 마음껏 샤워를 할 수가 없었다. 수액 라인은 4일에 한번 교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라인을 교체할 때 여러 조건이 맞는다면(내 컨디션이 괜찮고, 10~20분가량 항생제 투여를 중단해도 괜찮다는 의료진의 판단이 있으면) 양손이 자유로운 채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샤워는 한쪽 팔에 라인이 잡힌 채로 최대한 주삿바늘에 물이 닿지 않도록 애를 쓰는 동시에, 남은 한 손으로 대충 머리와 몸을 씻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했다. 한쪽손으로 엉성하게 씻는 샤워이지만 씻고 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개운함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 풍겨 나는 것 같던 쿰쿰한 냄새도 나지 않는 듯했고, 때 묻은 환자복도 멀끔한 새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의료진들은 이렇게 몸을 움직여 씻는다는, 아주 별 것 아닌 활동조차 내 몸과 컨디션에 무리가 가는 일로 간주했기 때문에 씻는 행위를 최대한 자제해 달라 요청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아래로는 계속 피와 양수가 섞여 흘러나오고, 늘 두꺼운 생리대를 찬 채로 지내야 하기 때문에 그 모든 찝찝함을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누군가는 임신 중 생리를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던데, 나는 임신 후 생리대를 가까이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밖은 더워지고, 보통 병실 온도는 바깥 온도에 비해 높았으므로, 찐득하지 않은 뽀송뽀송한 살갗과 떡지지 않은 매끄러운 머릿결의 느낌이 항상 그리웠었다.


5. 남편 보기

 엄마는 섭섭해하지만 입원 중 가장 그리웠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주중 30분가량되는 면회 시간에 찾아오는 이는 대부분 딸에게 먹을 것을 챙겨다 주는 친정 엄마들이었다. 면회를 위해서는 코로나 신속 항원 검사지가 있어야지만 가능했다. 때문에 대부분이 가까운 가족들만 그런 수고를 마다하고 30분이라는 짧은 면회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주말이 되면 면회 오는 이들 대부분은 임신부들의 남편들이었다. 원체 좁은 병실에서 이루어지는 면회이다 보니, 그들의 올망졸망한 대화 소리는 아무리 작은 볼륨으로 말해도 다 들릴 수밖에 없었다. 주중에 면회자가 따로 없는 것은 그리 서럽지 않으나, 주말에 나 홀로 덩그러니 누워있는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서글펐다. 남편은 그 당시 학기가 마무리되지 않은 탓에 여름 방학이 오는 6월 전까지 공식적으로는 한국에 올 수 없었다. 물론 어떤 응급 상황이 생기면 절차를 무릅쓰고 달려올 수 있기는 했지만, 남편의 일상마저 나처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최대한 남편의 한국 입국 날짜를 미루고 있었다. 임신 후 일련의 시간들을 겪으며 배우자로, 애인으로, 같은 역경을 헤쳐나가는 동지로 우리 둘 사이는 예전보다 훨씬 끈끈해져 있었다. 특히 내가 남편에게 기대는 의존도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 탓에 남편의 상황을 알고 충분히 동의했음도, 당장 내가 필요할 때 옆에 없다는 사실에 역정을 낼 때도 많았다.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무엇보다 절실하게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나게 던져진 날카로운 말들을, 남편은 고스란히 다 받아내야 했다. 아마 남편에게도 힘든 시간들이었으리라. 그렇게 남편이 그리웠다. 다른 때는 어떻게 이 악물고 참았지만, 종종 남편과 보내던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그리울 때면 많이 울었다. 다행이라면 우는 모습을 의료진들에게 잘 들키지 않도록 잘 숨겼다는 점이다. 의료진들부터 어쩜 그리 씩씩하냐는 말을 많이 들은 걸로 보아, 내 눈물 콧물이 들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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