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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Feb 17. 2022

지구온난화가 가져다준 불씨

2018년 핀란드의 여름은 뜨거웠고 내 마음은 더 뜨거웠다네

2018. 8


지구온난화로 헬싱키의 여름은 유례없는 활기를 찾았다. 근 한 달 동안 30도를 기록하였고 특별히 긴 해 덕분에 매일이 찬란했다. 혹은 강렬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연일 해변으로 호수로 공원으로 나갔다. 나는 핀란드에 와서 처음으로 끈 나시를 입고 더위를 느꼈다.


그를 만난 날에도 끈 나시에 파란색 스트라이프가 넘실대는 치마를 입었다. 믿을 수 없이 더운 여름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약 두 시간 정도 대화했을 때, 이전에 느낀 적 없는 이상한 짐작이 들었다. 강렬한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눈동자가 실은 짙은 올리브색이었다는 걸 눈치챘을 때부터였다. 호감이라고만 정의하기엔 이미 부풀어버린 마음을 짐작했다.


내 마음에 나무를 하나 심는 일이 지난 2년 동안 그렇게도 어려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오래 쉬었던 까닭에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혹여라도 나무의 뿌리가 자라지 못할까 항상 걱정했다. 내가 지나치게 물을 주는 것은 아닌지 햇빛은 적당한지 그리고 이 나무의 생명력은 내 애정과 비례하고 있는 것인지. 매일이 걱정스럽다가도 기쁘고 실망하다가도 감동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뿌리 없는 나무'라고 했다.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려본 적이 없고 있다 한들 쉽게 뽑힐 만큼 얕은 뿌리를 갖고 있단다. 나는 뿌리 없는 나무에 정성을 쏟은 셈이었다. 나만큼은 이 나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핀란드의 찬란한 여름


서로 멀어질 날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며칠 만에 잘 지내냐고 온 문자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고 쿨하지 못했다. 끝내 답을 하지 않다가 결국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안녕이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어디냐고 물었고 우리는 결국 만났다.


막상 만나서 한동안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가는 여름이 아쉽다고 말했고, 그는 웃으며 자신이 이 땅에 햇빛을 데려온 것이라 말하였다. 나는 그의 농담에 심심하게 웃고 말았다. 그 말을 듣자 떠나고 있는 여름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은 핀란드의 겨울을 떠올리자 심심하게도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나는 날에는 연일 25도 이상을 기록하던 날씨는 18도까지 떨어졌다. 그와 함께 여름도 가버렸다.  


나는 내가 제일 소중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상처 주기도 받기도 싫었다. 마지막 연애에서 헤어질 때도 나는 그런 사람에게 애정을 준 내 마음이 아깝고 서러워서 울었다. 그 사람과 멀어지는 것이 두려워서도, 앞으로 보지 않고 잘 지낼 자신이 없어서도 아녔다. 밀어내도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랑 노래의 가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핀란드에 오자 나에게서 지켜내고 싶은 것이 없었다. 나를 설명한다고 믿었던 것을 잃었다. 언어도 고고한 취향도 알량한 자존심도 핀란드라는 거대한 바다를 헤매는 부표 같은 나에게 사치였다. 나는 사람이라는 섬에 안착하고 싶었다. 단호하게 선을 긋고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애틋한 마음이 앞섰다. 내 마음이 그의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는 아낌없이 드러냈다.  


호구의 사랑법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호구가 되었지만, 반대로 호구가 되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호구든 뭐든 이런 나를 인정하고, 솔직해지는 것. 이 정도면 어른이 되었다고 코웃음을 쳐본다.


여름도 갔고 그도 갔고 나에게는 살아나야 하는 땅과 겨울이 남았다. 내 마음에 불씨라도 남아서 다행이다.




빅마마의 이영현은 '체념'의 구구절절한 가사를 단 53일 동안 만난 사람과 헤어진 후 썼다고 한다. 그녀가 그 말을 꺼내자 토크쇼 패널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뭐야, 53일의 사랑이었어?"라고 말했다. 나는 섣불리 야유를 보낼 수 없었다. 53일이면 어떻고 단 3일이면 어떤가. 로미오와 줄리엣은 첫눈에 반해 하룻밤 사이에 결혼을 약속했다.


사랑은 스펙트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호감으로만 치부할 일도 사랑으로 느낄 수 있다. 구구절절한 사랑이 단 53일간의 일화일 수도 있다. 나 역시 2018년 여름에 스쳐 지나간 그 사람에 대해 여전히 추억한다거나 그리워하지 않는다. 대단한 사랑도 아니었다. 아마 그에게도 나에게도 스쳐 지나가는 연애 일화 중 한 꼭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 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간 마음을 여전히 기억한다. 핀란드에서 친한 친구와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가 호호 할머니가 되면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웃을 수 있을 거야"라고. 아직 호호 할머니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2018년 여름을 생각하며 다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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