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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by 김민주



99. “형식주의를 대신해 사보타주.”




읽고 든 생각은 ‘그러니까, 이게 1960년대.’ 어째서 19세기 이전보다 가까운데 오히려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지 잘 모르겠다. 그의 단편들은 클래식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듯 쭉쭉 읽은 것도 있고, 더디게 읽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운전 중에 고개를 돌려 보이는 풍경은 차분하고 신비스러웠으며, 더듬더듬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고 싶은 단편이 있었다.

척추신경에 과학기술이 끼워진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디테일하게 상상한 부분들이 재밌었다. 제한된 단편 분량 안에서 그 상황을 저글링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메리 셀레스트식 이사, 공청회, 피아노 수송 작전, 또한 외로운 곳에서의 만남. 작가가 상상한 서사의 무대가 얼마나 기술적으로 진보했든, 늘 잠재적인 제약을 발견하고 부여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것이 좋았다.

그래, 늘 핵심은 제약과 균형이었다. 그러한 밸런스는 때로는 선악의 이분법이 소용없는 인물들에 의해(약삭빠른 사보추어나 GM효과의 준장), 때로는 원형 구조에 의해(벼룩의 벼룩, 탈출의 행복) 이루어졌다. 모든 인물과 기술이 그 자신에서 비롯된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덫을 상속하고 있었다. 많은 아이디어가 최초에는 제약과 균형이라는 인간 조건의 맥락에서 발생한 것 같아서 그의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느꼈다. 도시의 죽음에서도.

생명의 씨앗에서 드러난 것처럼 작가는 ‘명백히 우월한’ 과학 앞에 조금은 주눅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20세기에 생각 자체를 자신과 분리해서 바라볼 줄 아는 몇 안 되는 위인 중 한 명이었다. 이는 데이비드 봄과 칼 융도 강조했던 내용이다, 생각은 당신이 아니라고. 예를 들어, 벼룩의 벼룩에서는 슬로린이라는 외계인의 정신 구름으로부터 발생하고 영향을 받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역으로 슬로린의 발목을 잡는 설정이 나온다. 이처럼 생각이나 의식 자체에 의지를 부여한 설정이 많았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언어가 매력적이었다. 특히, 책을 연 정신의 장을 서술한 언어가 명료하고 좋았다. 작가는 다축 방적기와 같은 기술의 집약체들이 사실은 그저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나왔을 뿐이라고 공청회에서 말한다. 이는 수학이 발명일까 발견일까에 대한 나의 생각과 통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생각의 반자동성과 어떠한 방향성. 나는 학자보다 작가가 인간으로서 보다 많은 자유도의 자유의지를 누리고 활용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이디어 말고도 작가의 세부적인 언어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님이 고생하신 덕분이 정말 크다고 느낀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니나가 말했듯 문학에서 차별화가 가능한 부분은 역시 소재보다 문체인 것 같다. 작가의 스타일은 말하자면 거센 흐름이 유려했다. 존재의 기계와 눈치 빠른 사보추어에서는 띄엄띄엄 이어지는 대화가 선문답 같으면서도 어렴풋이 실재를 전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사보추어는 영화 오펜하이머와 같은 결로 섹시했다. 해당 단편은 현실 사회와 과학적 상상이 가미된 서사의 무대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멋진 사례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참조한 법률적 언어와 타이밍 좋은 정보 공개로 독자가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읽을 수 있게 구성했다.

묘사가 정말 중요하단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은 머릿속에 잘 유지하지 못했지만 장면과 배경은 꽤 생생하게 남았다. 규정 제일주의의 언어는 제법 어렵고 그럴 듯 했는데(ex. 위상 아크, 각우주, 채찍질 등) 인터넷도 보급돼있지 않았을 1966년에 어떻게 자료조사를 해서 팬시하고 매끈한 세계를 구축해냈을지 가늠이 안 됐다. 거기를 읽다가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밤늦게 팔자 줄넘기를 훈련하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요즈음의 SF에서는 소수자성을 결부시킴으로서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추세라고 생각한다. 프랭크 허버트의 단편들에는 특별히 그러한 요소는 없었지만 인간 조건에 대해 깊이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치열히 탐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그 자신이 말했듯이 ‘생산적인 긴장 상태’를 불어넣는 거인의 숨결이 담겨있었다. 인류를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는 훌륭한 moderator 역할을 수행한 것 같다. 영화로도 만나보지 못한 작가와의 첫 만남이 아주 흡족했다.


p.s. 사보추어를 읽다가 실리카겔 데저트 이글 TRPG 보드게임이 생각났는데 비슷한 보드 게임 알고 계시는 분은 알려주세요.


160. 아마추어 무선사(→무전사)를 위한 길잡이라는 책의 설명대로 조립했습니다.

171. 다축 방척기(→방적기)도 때가 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401. 마을 사람 들을(→사람들을) 지나 휘트를 거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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