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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시골 학교 선생님입니다! (2)

천국인듯 지옥인듯 천국같은

by 보보씨

U중학교로 (공식적으로) 출근하는 첫날이다.


그간 포근하고 따뜻하던 날씨는 귀신같이 출근날에 맞춰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기어이 아침부터 진눈깨비를 흩날리기 시작했다.


해가 아직 안 뜬 건지, 구름이 가린 탓에 안 보이는 건지, 하늘은 어슴푸레했다.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한 피로감이 핸들을 덮었다. 개학 전날이면 으레 깊이 잠에 들지 못하기도 하지만 두시간 반이나 운전할 걱정에 밤새 뒤척거린 탓이다.


- 덤프트럭이 내 차를 치고 가면 어떡하지?

- 졸음운전하다가 가드레일 박고 낭떠러지로 추락하면 어떡하지...?

- 내 차가 죄 없는 고양이를 밟으면 어떡하지...!!


밤새 반복되던 걱정에 날씨마저 흐리니 피곤함에도 핸들을 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다행히 출근길에는 덤프트럭도, 가드레일 밑 낭떠러지도, 애꿎은 고양이도 없었다. 하지만 학교 정문을 넘기도 전에 피로함이 짓누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학교 정문을 넘어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정문 위에 크게 걸린 플랜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대문짝만하게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살아생전 그리고 앞으로도 내 이름이 저정도로 크게 인쇄 되어서 어디에 걸릴 일은 없겠다, 싶을 정도로 크게 말이다.


"망했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실무사 선생님이 입학생 이름과 내 이름을 헷갈린 게 분명했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 어떻게 학생이랑 전입 교사 이름을 헷갈릴 수 있단 말인가! 빨리 가서 저 플랜카드 내리라고 해야한다...! 아,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실무사 선생님은 얼마나 난처해할 것인가!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다시 플랜카드 보니 익숙한 이름이 두 개 더 보였다.


나와 같이 이번에 U중학교로 전입한 선생님 이름이었다.


가만히 서서 보니 학교 입구부터 위풍당당하게 걸린, 수백미터 전방에서도 볼 수 있을 저 플랭카드는 전입 교사를 환영하기 위해 붙은 모양이었다. 멋진 그림도, 예쁜 폰트도 아닌, 별다른 꾸밈이 없이 투박하게 붙은 플랜카드다. 그런데 이내 플랜카드를 보며 조금은 벅찬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새로운 입학생 만큼이나 당신들을 환영해요.

라고 학교가 말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벅찬 건 벅찬 거고, 일은 일이다.


첫날이면 으레 나는 어디, 여긴 누구 하는 모양새로 멀뚱멀뚱 앉아 있어야겠지만, 소규모 학교는 그런 얼렁뚱땅한 첫날을 허락하지 않는다.


새학교에서 업무포털에 첫 로그인.

처리해야 할 업무 목록에는 16건의 문서가 대기 중이었다. 파티션 넘어 교무부장 선생님은 오전만 20개의 문서를 기안하셨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떠듬떠듬 낯선 공문을 읽고 있는 와중에도 입학식 시간은 다가왔다.

주변의 선생님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강당으로 발걸음을 뗐다.


신입생 3명을 위한 입학식이라니!

신입생으로만 강당을 꽉 채우는 시내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할 장면이었다.


강당에 들어서니 다 모여도 열 셋(아쉽게도 두명은 개학 전에 전학을 갔다.) 뿐인 아이들이 단상 앞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신입생이 셋 뿐이더라도, 전교생이 열셋밖에 되지 않더라도 입학식은 큰 학교 못지 않게 격식을 갖춰 진행됐다.


입학 선언, 진급 허가, 선후배간 상견례, 장학금 수여까지. 짧지만 꽉 찬 입학식이었다. 한 학급의 절반도 안 되는 수지만 입학식에 임하는 아이들의 자세는 자못 진지했다. 또박또박 입학 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 단상 앞에 나설 때마다 청중을 향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눈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입학식이 끝난 후, 난 기적을 보았다.


입학식 끝! 이라는 외침을 듣자마자 아이들은 강당에 깔린 의자를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쌓아 정리하는 것 뿐 아니라 알아서 의자를 강당 다용도 실에 넣고, 몇명은 바닥에 깔린 거대한 방수포를 접어 개기 시작했다. 한명도 뺀질거리거나 불평하는 아이들 없이, 그리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 방수포를 가지고 장난하는 아이들 없이...


믿을 수 없어 옆에 있는 선생님께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강하게 보냈다.


왜! 아이들이! 알아서! 뒷정리를 하는 거죠?

(= 왜 중학생들이 방수포에서 슬라이딩을 하거나, 엎어치기를 하거나, 몇 개씩 쌓인 의자 위에 꾸역꾸역 올라가서 앉거나, 뒷정리를 할 때 이걸? 제가? 왜요? 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죠?)


옆 선생님은 포근히 웃으며 말하셨다.

"여기 애들은 알아서 다 해요. 정리에 익숙하죠."

그리고 아, 이제 일하러 가야겠다 라는 말과 함께 총총 사라지셨다.


홀연히 사라져가는 선생님의 뒷모습과 밝게 웃으며 의자를 정리하는 아이들의 앞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이곳은 무엇인가.

지옥의 출근길과 천당의 환대가 공존하는 이곳은..

지옥에서 온 업무의 레퀴엠과 천사들의 합창이 동시에 울려퍼지는 이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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