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드는 작품 안에서 나는 마에스트로다. 깐깐한 캐스팅 디렉터이자 예술혼 가득한 감독이며 가위를 꼬나쥔 절대적 권력의 편집자다. 그리고 대량 생산을 꿈꾸는 공장장이다.
공장장의 입장에서는 좋은 꽃이다. 가성비와 물리적 공간 장악력이 훌륭하니까. 캐스팅 디렉터도 찬성을 했다. 수국 값이 금값인 겨울에 이만한 꽃 없다면서. 주연 결정에 열을 올리고 있던 감독은 그 정도는 니들이 알아서 하라며 손을 휘휘 내 저었다. 어차피 자리를 채워주는 조연이니까. 그런데 편집자가 의의를 제기했다. 얼빡샷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페이스에 점들이 너무 많다면서. 그제야 감독이 고개를 든다. 그래? 얼마나?
알스트로메리아는 1센티 정도 굵기의 큰 줄기에서 5~6개로 갈라진 10센티가량의 가는 줄기 끝에 작은 백합 비슷한 꽃이 피는 종류다. 빗속을 걷다가 순간적으로 갑자기 불어오는 센 바람에 확 뒤집어진 우산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한 대에 5~6 송이의 꽃이 있는 것이니 한 번만 팍 하고 꽂으면 수국만큼의 공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검은 점 정도는 수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알스트로가 가진 약점이 또 있다. 이미 한 번 기울어져 있는 우산살 가지에서 또 꺾인 각도로 꽃이 핀다는 거다. 직립하고 있는 가지 끝에 똑바로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있는 여러 꽃들 가운데서 혼자 갸우뚱하고 있다는 건 매우 굵은 미운털이다. 특히 꽃다발을 만들 때 단어 그대로 '각'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BTS가 좋아도 백댄서 중 한 명이 약속된 정면 응시 정지동작을 무시하고 퇴장하는 오빠들 따라 고개를 꺾을 수는 없으니까.
꽃시장 안에는 개량이라는, 새롭다는 단어가 늘 존재한다. 거의 모든 종류의 꽃에서 알게 모르게 조금씩 개량은 일어나지만 알스트로는 적어도 지난 5년간 가장 활발하게 약점이 개선된 꽃 중 하나다. 먼저 한 번 고개가 꺾였던 꽃에서 똑바로 하늘을 보는 꽃이 되었다. 그리고 검은 점들이 없어진 페이스가 깨끗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번에 드디어 버전 3이 출시되었다.
1. 더 길어진 우산살에 따른 확 트인 시야 확보; 10센티 정도였던 우산살 가지가 30센티 정도가 되었음. 그만큼 길어진 가지를 따라 활짝 핀 꽃 하나와 개화 직전의 봉오리 한 두 개, 좀 있어야 필 봉오리 한 두 개를 동시에 볼 수 있음. (버전 2까지는 시든 꽃 하나를 잘라내야 숨어있던 봉오리를 볼 수 있었음. )
2. 더 길어진 수명; 밑에서부터 차례로 피는 꽃을 감상할 수 있음.
3. 더 좁혀진 우산살 각도 ; 한 30도는 되었던 버전 1,2에 비해 버전 3은 직립에 가까워졌음. 그래도 워낙 길어진 우산살 가지 때문에 차지하는 공간은 여전히 넉넉함. 아니 오히려 더 넓어졌음.
총평; 보통 사이즈의 우산에서 골프 우산이 되었음.
개선된 장점이 워낙 강렬해서 6장의 꽃잎 중에 여전히 있는 2장 위의 검은 선들은 이제 약점이 되지 않는다. 주연과 같은 소속사라는 특혜로 그저 꽂아지던 조연이 자기 계발이라는 인내의 세월을 견뎌 어느덧 주연보다 먼저 캐스팅되는 연기파 배우가 된 셈이다. 버전 5쯤 되면 이 녀석들 우산살 하나하나가 낭창한 글라디올러스처럼 될지도 모를 일이다.
관리법
1. 맨 밑의 꽃이 활짝 피지 않았다면 가지 끝을 한 번 자르고 따끈한 물에 30초 정도 담갔다가 화병에 꽂기를 추천한다.
2. 버전 3가 나왔어도 수선화과가 장미과가 되지는 못한다. 물을 자주 갈아주고 큰 가지 끝을 조금씩 잘라주어야 한다.
3. 밑에서부터 피었다 시든 꽃들은 바짝 잘라 주어야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봉오리들이 제대로 개화를 한다.